《Gathering Flowers》는 디자이너 신해옥의 관심과 태도가 디자인의 방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협업자들과 함께 담은 프로젝트다. ‘(신중하게) 꽃을 모으듯’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필자의 다양한 글을 선별하여 한데 묶은 출판물, 선집의 어원인 ‘anthologia’에서 빌려온 프로젝트의 제목은 디자이너를 작업자이자 저자로서 바라보는 프로젝트의 접근과 태도를 은유한다. 디자이너는 작업자로서 사물과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수집하며, 이를 시각언어로 잇고 배치하는 편집 과정을 따라 구조를 짓는다. 뿐만 아니라 시각적 사고를 가진 저자로서 시각물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경험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는 디자인의 이러한 수행적 실천에 주목한다.
프로젝트는 디자이너 신해옥이 수집한 말, 생각, 이미지를 담은 글과 이미지 뭉치 「개별꽃」을 씨앗 삼아, 이를 해석하는 협업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형되고, 상이한 생각과 구조를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수집된 말과 생각을 신체와 공간이라는 다른 매체로 전환하는 매개자라기보다는, 「개별꽃」을 해석하여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드는, ‘꽃을 모으는’ 생산자가 된다.
동명의 출판물 『개별꽃』은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되었던 신해옥의 「개별꽃」을 비롯하여 이를 건네어 받은 협업자들의 생각과 언어가 틔워낸 ‘꽃’을 모은 선집이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구성된다. 책의 전반부에 수록된 신해옥이 작성한 「개별꽃」은 성격이 다소 다른 세 꼭지의 글로 이뤄진다. 첫 번째 꼭지에서는 편집자이자 생산자로서 디자이너의 활동을 ‘선집’에 비유하여 앞으로 전개될 글을 소개하고, 이어서 자신의 관심사와 디자인 방법이 느슨히 또 긴밀히 연결되는 수집한 글과 이미지들을 주관적인 당위에 따라 타래처럼 펼쳐 놓는다. 마지막 꼭지는 이 과정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결과물로서 새롭게 배치되고 응집된 구조의 책을 익명 저자의 시점에서 탐험하는 픽션으로 마무리한다.
후반부에 이어지는 세 편의 글은 신해옥의 활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그 개념을 확장하며 디자인의 구조적, 수행적 측면 등 주요한 관점을 살핀다. 김뉘연은 신해옥의 책 작업을 열고 닫히는 순간마다 동기화되는 사물로 바라보고 이를 양손으로 펼쳐낸 독자에게 도움이 될만한 적절한 지침을 안내한다. 책에 담긴 내용이 아닌 책이 지어진 구조 자체를 여러 각도에서 면밀히 들여다보고 감각하듯 서술한다. 린다 판 되르선은 그의 디렉토리 어딘가에 저장된 세 장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를 추적하는 듯한 글쓰기를 선보인다. 본래의 맥락에서 탈각된 개별 이미지에 길게 늘어뜨린 설명을 덧붙여서 이미지와 글이 공생하는 디자이너의 '시각적 방황'을 중계한다. 이미지와 활자가 서로 접합되어 한 줄기에서 흐르는 모양새가 신해옥의 「개별꽃」에서 보이는 편집자적 면모와 닮아있다. 구정연은 디자이너가 생산한 아티스트 북에 대한 질문으로 글을 연다. 그는 2006년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최된 《큐레이터의 사물함》과 연계하여 슬기와민이 제작한 『A REVISED INVENTORY』를 경유하여 책의 구조를 통해 특정한 읽기의 행위를 추동하는 것이야 말로 디자이너의 실천이자 디자인의 수행성이라 주장한다.
「개별꽃」에서 시작된 해석과 편집의 무한 타래는 협업자들의 언어를 따라 여러 차원을 지나 다시 책 『개별꽃』으로 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개별꽃이 인쇄된 책갈피를 책 속에 끼워 독자들에게 건넨다. 책갈피를 움직이는 손을 따라 지면을 이동하며 이 타래의 구조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박가희, 이미지
목차
들어가며 — 박가희, 이미지
개별꽃 — 신해옥
사물의 방식 — 김뉘연
드레스 부류하기 — 린다 판 되르선
특별한 읽기의 조건 만들기 — 구정연
참여자들
지은이
구정연
불문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디자인 전시 큐레이터를 거쳐, 미디어버스와 더북소사이어티를 공동 운영했다. 《예술가의 문서들: 예술,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협업》(2016) 전시를 공동 기획했고, 『래디컬 뮤지엄』(현실문화, 2016)을 공역했다. MMCA 작가연구 총서 및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2019: 초국가적 미술관』, 아카이브 연구 포럼 <부재하는 아카이브: 디자인, 건축, 시각문화>(2019)를 기획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김뉘연
작가, 편집자. 〈문학적으로 걷기〉, 〈수사학: 장식과 여담〉, 〈시는 직선이다〉, 《비문: 어긋난 말들》, 〈마침〉, 《방》 등으로 문서를 발표했고, 『말하는 사람』과 『모눈 지우개』를 썼다.
린다 판 되르선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이다. 1987년부터 아르만트 메비스와 함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인 ‘메비스 & 판 되르선’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는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의 그래픽 디자인과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예일대학교 예술대학 그래픽 디자인과 크리틱으로, 헤이그 왕립 예술학교의 마스터 과정인 NLN(논 리니어 내러티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박가희
기획자. 전시를 하나의 매체로 간주하고, ‘앎의 사건’을 촉발하는 전시의 수행적 실천에 관심이 있다.
신해옥
그래픽 디자이너. 책을 구조로 삼아 텍스트, 이미지, 페이지를 서로 교차시키며 직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관계성에 주목한다. 2014년부터 신동혁과 함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신신’을 운영해오고 있으며, 대학에서 강의하며 본인의 관심사를 학생들과 동기화하고 있다.
이미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기획자. 디자인과 미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관계 속에서 번안되는 감각과 의미 체계에 관해 탐구한다.
책 속에서
사물로서의 책. 인쇄된 책은 사물로 존재한다. 사물로서 책이 존재하게 된 방식은 사물로서 책이 존재할 수 있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책을 만드는 역할을 맡은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들게 되는 이 사물이 적절히 작동할 만한 방식을 고안해 낸다. 닫힌 책은 열리면서 작동된다. 펼쳐졌을 때, 즉 움직여졌을 때 책은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는가. 시공간에서 여러 움직임으로 변주될 잠재 가능성을 품은 책들. 이 글은 그동안 디자이너 신해옥이 협업자 신동혁과 함께 ‘신신’으로 활동하며 만들어 온 인쇄물 몇 점을 재료로 삼아 움직임을 내포하는 사물로서의 책을, 그 제작 방식과 사용 방식을 짐작하거나 가늠해 보고 구상해 보기도 하는 우회적 안내문이다. (김뉘연, 「사물의 방식」, 94페이지)
후에 여배우 앤 셰리든으로 명성을 얻게 된 클라라-루 셰리든은 사진 속에서 마치 인쇄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드레스는 두 개의 다른 포스터를 한 장으로 완성하여 이루어져 있다. 스커트는 밝은 주황색과 파란색의 세로형 포스터로, 소매는 보라색과 빨간색의 가로형 포스터의 일부를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이 포스터들은 배급사가 영화 홍보를 위해 제작한 수많은 아이템들 중 두 가지 항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의는 포스터의 어떤 부분인지 정확히 식별하기가 더 어려워 보이지만, 아마도 빌보드 같은 대형 광고를 위해 제작된 인쇄물일 것이다. 당시 대형 가로 광고판을 채우려면 용지가 총 24장 필요했다. 이미 미국에서는 1900년에 빌보드 구조에 붙게 되는 대형 광고가 표준화되었고, 정밀한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는 오프셋 인쇄가 발달하면서 전국적으로 광고 캠페인에 붐이 일었다. 나는 미국의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1936년 작품인 〈애틀랜타의 집과 빌보드들〉을 떠올린다. 에반스의 사진 한가운데에 캐럴 롬바드가 출연한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또 다른 영화 〈러브 비포 브랙퍼스트〉를 홍보하는 빌보드가 보인다. (린다 판 되르선, 「드레스 분류하기」, 110페이지)
아티스트 북은 통상적인 관점에서 예술가 개인이 만드는 책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술가 개인이 제작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아티스트 북을 특정 개인의 작업으로 귀속시키는 것에 뭔가 불공정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협업이든, 의뢰든 복수의 저자가 존재하는 아티스트 북에서 디자이너의 주권은 어떻게 획득될까. 2000년대 중반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전시라는 외부 환경 및 예술가와 적극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아티스트 북을 디자인 실천을 확장하는 동시대적 매체이자 방법론으로 삼았다. 어느 때보다 종이 인쇄물은 다량 생산되었고, 미술기관은 특정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기관 고유의 시각 언어를, 또 개별 작가들은 아티스트 북을 생산해갔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마주하는 풍경은 전통적인 책의 구조와 제작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도대체 디자이너가 만든 아티스트 북은 무엇인가. (구정연, 「특정한 읽기의 조건 만들기」, 122페이지)
《Gathering Flowers》는 디자이너 신해옥의 관심과 태도가 디자인의 방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협업자들과 함께 담은 프로젝트다. ‘(신중하게) 꽃을 모으듯’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필자의 다양한 글을 선별하여 한데 묶은 출판물, 선집의 어원인 ‘anthologia’에서 빌려온 프로젝트의 제목은 디자이너를 작업자이자 저자로서 바라보는 프로젝트의 접근과 태도를 은유한다. 디자이너는 작업자로서 사물과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수집하며, 이를 시각언어로 잇고 배치하는 편집 과정을 따라 구조를 짓는다. 뿐만 아니라 시각적 사고를 가진 저자로서 시각물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경험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는 디자인의 이러한 수행적 실천에 주목한다.
프로젝트는 디자이너 신해옥이 수집한 말, 생각, 이미지를 담은 글과 이미지 뭉치 「개별꽃」을 씨앗 삼아, 이를 해석하는 협업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형되고, 상이한 생각과 구조를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수집된 말과 생각을 신체와 공간이라는 다른 매체로 전환하는 매개자라기보다는, 「개별꽃」을 해석하여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드는, ‘꽃을 모으는’ 생산자가 된다.
동명의 출판물 『개별꽃』은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되었던 신해옥의 「개별꽃」을 비롯하여 이를 건네어 받은 협업자들의 생각과 언어가 틔워낸 ‘꽃’을 모은 선집이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구성된다. 책의 전반부에 수록된 신해옥이 작성한 「개별꽃」은 성격이 다소 다른 세 꼭지의 글로 이뤄진다. 첫 번째 꼭지에서는 편집자이자 생산자로서 디자이너의 활동을 ‘선집’에 비유하여 앞으로 전개될 글을 소개하고, 이어서 자신의 관심사와 디자인 방법이 느슨히 또 긴밀히 연결되는 수집한 글과 이미지들을 주관적인 당위에 따라 타래처럼 펼쳐 놓는다. 마지막 꼭지는 이 과정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결과물로서 새롭게 배치되고 응집된 구조의 책을 익명 저자의 시점에서 탐험하는 픽션으로 마무리한다.
후반부에 이어지는 세 편의 글은 신해옥의 활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그 개념을 확장하며 디자인의 구조적, 수행적 측면 등 주요한 관점을 살핀다. 김뉘연은 신해옥의 책 작업을 열고 닫히는 순간마다 동기화되는 사물로 바라보고 이를 양손으로 펼쳐낸 독자에게 도움이 될만한 적절한 지침을 안내한다. 책에 담긴 내용이 아닌 책이 지어진 구조 자체를 여러 각도에서 면밀히 들여다보고 감각하듯 서술한다. 린다 판 되르선은 그의 디렉토리 어딘가에 저장된 세 장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를 추적하는 듯한 글쓰기를 선보인다. 본래의 맥락에서 탈각된 개별 이미지에 길게 늘어뜨린 설명을 덧붙여서 이미지와 글이 공생하는 디자이너의 '시각적 방황'을 중계한다. 이미지와 활자가 서로 접합되어 한 줄기에서 흐르는 모양새가 신해옥의 「개별꽃」에서 보이는 편집자적 면모와 닮아있다. 구정연은 디자이너가 생산한 아티스트 북에 대한 질문으로 글을 연다. 그는 2006년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최된 《큐레이터의 사물함》과 연계하여 슬기와민이 제작한 『A REVISED INVENTORY』를 경유하여 책의 구조를 통해 특정한 읽기의 행위를 추동하는 것이야 말로 디자이너의 실천이자 디자인의 수행성이라 주장한다.
「개별꽃」에서 시작된 해석과 편집의 무한 타래는 협업자들의 언어를 따라 여러 차원을 지나 다시 책 『개별꽃』으로 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개별꽃이 인쇄된 책갈피를 책 속에 끼워 독자들에게 건넨다. 책갈피를 움직이는 손을 따라 지면을 이동하며 이 타래의 구조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박가희, 이미지
목차
들어가며 — 박가희, 이미지
개별꽃 — 신해옥
사물의 방식 — 김뉘연
드레스 부류하기 — 린다 판 되르선
특별한 읽기의 조건 만들기 — 구정연
참여자들
지은이
구정연
불문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디자인 전시 큐레이터를 거쳐, 미디어버스와 더북소사이어티를 공동 운영했다. 《예술가의 문서들: 예술,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협업》(2016) 전시를 공동 기획했고, 『래디컬 뮤지엄』(현실문화, 2016)을 공역했다. MMCA 작가연구 총서 및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2019: 초국가적 미술관』, 아카이브 연구 포럼 <부재하는 아카이브: 디자인, 건축, 시각문화>(2019)를 기획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김뉘연
작가, 편집자. 〈문학적으로 걷기〉, 〈수사학: 장식과 여담〉, 〈시는 직선이다〉, 《비문: 어긋난 말들》, 〈마침〉, 《방》 등으로 문서를 발표했고, 『말하는 사람』과 『모눈 지우개』를 썼다.
린다 판 되르선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이다. 1987년부터 아르만트 메비스와 함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인 ‘메비스 & 판 되르선’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는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의 그래픽 디자인과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예일대학교 예술대학 그래픽 디자인과 크리틱으로, 헤이그 왕립 예술학교의 마스터 과정인 NLN(논 리니어 내러티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박가희
기획자. 전시를 하나의 매체로 간주하고, ‘앎의 사건’을 촉발하는 전시의 수행적 실천에 관심이 있다.
신해옥
그래픽 디자이너. 책을 구조로 삼아 텍스트, 이미지, 페이지를 서로 교차시키며 직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관계성에 주목한다. 2014년부터 신동혁과 함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신신’을 운영해오고 있으며, 대학에서 강의하며 본인의 관심사를 학생들과 동기화하고 있다.
이미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기획자. 디자인과 미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관계 속에서 번안되는 감각과 의미 체계에 관해 탐구한다.
책 속에서
사물로서의 책. 인쇄된 책은 사물로 존재한다. 사물로서 책이 존재하게 된 방식은 사물로서 책이 존재할 수 있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책을 만드는 역할을 맡은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들게 되는 이 사물이 적절히 작동할 만한 방식을 고안해 낸다. 닫힌 책은 열리면서 작동된다. 펼쳐졌을 때, 즉 움직여졌을 때 책은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는가. 시공간에서 여러 움직임으로 변주될 잠재 가능성을 품은 책들. 이 글은 그동안 디자이너 신해옥이 협업자 신동혁과 함께 ‘신신’으로 활동하며 만들어 온 인쇄물 몇 점을 재료로 삼아 움직임을 내포하는 사물로서의 책을, 그 제작 방식과 사용 방식을 짐작하거나 가늠해 보고 구상해 보기도 하는 우회적 안내문이다. (김뉘연, 「사물의 방식」, 94페이지)
후에 여배우 앤 셰리든으로 명성을 얻게 된 클라라-루 셰리든은 사진 속에서 마치 인쇄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드레스는 두 개의 다른 포스터를 한 장으로 완성하여 이루어져 있다. 스커트는 밝은 주황색과 파란색의 세로형 포스터로, 소매는 보라색과 빨간색의 가로형 포스터의 일부를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이 포스터들은 배급사가 영화 홍보를 위해 제작한 수많은 아이템들 중 두 가지 항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의는 포스터의 어떤 부분인지 정확히 식별하기가 더 어려워 보이지만, 아마도 빌보드 같은 대형 광고를 위해 제작된 인쇄물일 것이다. 당시 대형 가로 광고판을 채우려면 용지가 총 24장 필요했다. 이미 미국에서는 1900년에 빌보드 구조에 붙게 되는 대형 광고가 표준화되었고, 정밀한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는 오프셋 인쇄가 발달하면서 전국적으로 광고 캠페인에 붐이 일었다. 나는 미국의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1936년 작품인 〈애틀랜타의 집과 빌보드들〉을 떠올린다. 에반스의 사진 한가운데에 캐럴 롬바드가 출연한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또 다른 영화 〈러브 비포 브랙퍼스트〉를 홍보하는 빌보드가 보인다. (린다 판 되르선, 「드레스 분류하기」, 110페이지)
아티스트 북은 통상적인 관점에서 예술가 개인이 만드는 책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술가 개인이 제작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아티스트 북을 특정 개인의 작업으로 귀속시키는 것에 뭔가 불공정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협업이든, 의뢰든 복수의 저자가 존재하는 아티스트 북에서 디자이너의 주권은 어떻게 획득될까. 2000년대 중반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전시라는 외부 환경 및 예술가와 적극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아티스트 북을 디자인 실천을 확장하는 동시대적 매체이자 방법론으로 삼았다. 어느 때보다 종이 인쇄물은 다량 생산되었고, 미술기관은 특정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기관 고유의 시각 언어를, 또 개별 작가들은 아티스트 북을 생산해갔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마주하는 풍경은 전통적인 책의 구조와 제작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도대체 디자이너가 만든 아티스트 북은 무엇인가. (구정연, 「특정한 읽기의 조건 만들기」, 12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