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6월 발간 예정인 알레산드로 루도비코의 신간 《전술적 출판》 발간에 맞춰 진행한 서면 인터뷰 내용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구조를 조금 더 엿볼 수 있도록 상세 목차 역시 함께 공개합니다.
그의 전작 《포스트디지털 프린트》가 인쇄 문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디지털’ 출판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것의 필요와 불필요를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했다면, 이번 책은 그 연장선에서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맥락 속에서 출판의 전술적 위치를 고민합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목차만 보더라도 이 책이 무엇을 언급하고, 어떤 사례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게 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 출판과 AI가 초래한 정보의 범람은 출판이 지닌 신뢰 자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도비코가 전작부터 일관되게 강조해온 것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번 책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제안하는 ‘기계적 글쓰기’를 넘어선 ‘기계와 함께 글쓰기’ 역시 단순한 기술 낙관론처럼 읽히지는 않습니다.
루도비코 책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례들을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의 가치 중 절반 이상이 이러한 사례들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뉴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접했던 급진적 출판의 흐름과, 어쩌면 기존의 의미에서 ‘출판’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실험들을 20세기 초반부터 현재까지 폭넓게 가로지르며 소개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책의 부록인 「21세기를 위한 출판 실험 100선 주석 목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 수록된 100권의 책은 단순히 ‘실험적’인 책들의 목록이라기보다, 인간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디까지 사고와 감각을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개념적 주기율표처럼 보입니다. 현실의 원소들을 배열한 지도가 주기율표라면, 여기 제시된 책들은 우리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감각의 장소들을 배열한 지도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이 책은 대중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 대부분이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은 출판이 어떠한 방식으로 다시 신뢰 가능한 읽기와 정보의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질문하게 만듭니다. 루도비코가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은 단순한 출판 실험의 기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출판 문화를 오늘의 조건 속에서 다시 작동시키기 위한 전략들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그는 소규모 출판과 독립출판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그리고 탈진실의 풍경 속에서 출판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도 함께 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적 출판》은 단순히 출판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오늘날 책과 읽기, 정보와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하나의 실천적 제안처럼 읽힙니다.
목차
닉 몽포르의 서문
서론
1 감각의 영역
인쇄물의 촉각적 모사
후각, 청각, 시각 안에서 디지털 독서 경험
후각, 청각, 시각을 통한 인쇄물 독서 경험
인쇄물과 디지털 독서에서 촉각
주요한 읽기 인터페이스로서의 촉각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기: 정보로서의 박테리아
정보의 물질적 공간
감각적으로 확장된 출판의 한 사례: 출판과 음악의 유희적 접속
소리는 인쇄물을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구술문화를 죽인 후에)
종이 위의 소리
소리를 내는 출판물과 일시적 아날로그 미디어
소리를 내는 출판물과 일시적 디지털 미디어
현대 출판물에서 기술 중심의 아날로그 미디어
음악 잡지 읽기 경험
2 비인간적 글쓰기
그럴듯함: 조합적 글쓰기
난니 발레스트리니: "테이프 마크 1"
울리포: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신뢰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기술적 맥락
문학 트윗봇: 직장에서 소프트웨어 작성
대화 도구로서의 ‘인식되지 않은 문학’
저자성: 어쩌면 이 장은 기계가 쓴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와 함께 글쓰기: 지원 시스템으로서의 기계
3 행동주의 탈진실 출판
불확실성 시대의 조작적 출판
금지된 출판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이후의 가짜 신문
일 말레: 1970년대의 가짜 신문
예스 맨: 새로운 밀레니엄의 가짜 신문
뉴스 형식과 프레임워크의 중요성
가짜 출판의 전환: 비판적 예술에서 탈진실 시대의 효과적인 조작으로
저자성, 리믹스 그리고 딥페이크
신뢰할 수 있는 인간 네트워크
출처와 맥락의 붕괴
정보의 속도와 개인적 정보 댐
개인적인 신뢰 네트워크
인간 그물망 네트워크
4장 무한함: 디지털 출판의 패러다임
공간없는 책을 찾아서: 전자 출판 고고학
무한 출판의 역사
공상 과학 소설의 비전
콘텐츠 공간의 디지털적인 무한 붕괴
끝없는 출판 패러다임: 공간, 시간, 기억
즉시 출판의 무한 패러다임
끝없는 흐름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시각적으로 멈추지 않는 온라인 시간 여행
읽기 능력의 한계
모든 것이 뉴스다: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하기 위한 정보의 파편화
새로운 방송 형식의 부상
아티스트 출판물에서 실제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렌더링
끝없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5장 문화적 게릴라로서 도서관
새로운 도서관의 중추적인 역할
기념비적 자산으로서 도서관
관리자와 보편적 도서관
인터넷을 인쇄하기
예술가의 도서관
수행적 공간으로서 도서관
또 다른 문화적 지형: 독립 도서관과 DIY 도서관
분산된 도서관
임시 도서관
경계의 사서적 실천
임시 도서관의 이론과 실천
주술사로서의 사서
6장 21세기에 우리는 어떻게 출판해야 하는가
우리는 새로운 출판 생태계에 있다
시공간의 생태학
기계의 생태학
유통의 생태학
역장의 생태학
출판의 헤테로토피아를 향해
감사의 말
부록: 21세기를 위한 출판 실험 100선 주석 목록
참고문헌
알레한드로 루도비코 인터뷰
알레한드로 루도비코 인터뷰
이 책에서 “전술”은 하나의 방법론이라기보다, 오늘날의 제도적·경제적·기술적 조건이 부과한 실천의 형식처럼 보입니다. 선생님은 ‘전술적 출판’을 의식적으로 선택된 전략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동시대 출판 환경이 강제한 결과로 보시나요?
어느 정도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책에서 살펴본 것처럼 출판에서 전술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접근과 유통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여기서 “전술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상업적 인쇄와 유통이 전제하는 표준적인 개념적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의미하죠. 다른 한편으로, 특히 독립 출판자들에게 전술적 태도는 두 가지 종류의 문화적 범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머신러닝 기반 AI가 만들어내는 훨씬 더 거대한 생산물입니다. 따라서 지속 가능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영감을 주는 출판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은, 제가 보기에, 21세기 오늘날 가장 전략적인 출판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술은 유연하고 기민하지만, 반복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이나 공식으로 굳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전술적 출판이 스스로를 잠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할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대답하자면, 전반적으로 당신의 지적은 옳습니다. 전술은 효과를 발휘할 때 유효하며, 역사적으로 볼 때 전술은 그것이 작동하는 맥락과 조건이 변화하거나 산업에 의해 흡수되면서 점차 효과를 잃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그 개념적 힘은 더 오래 지속되며, 조금 수정되거나 혹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구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전술의 유연성과 기민함은 그것이 결코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할 때 보존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 환경에서 하나의 종이 생존을 위해 적응하듯이 변화해야 합니다. 전술적 출판은 문화적 환경과 시장의 역학을 이해하고, 독립적인 사유와 출판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취할 때, 전술적 출판은 스스로를 잠식하지 않고 번성해왔습니다.
당신은 디지털 환경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인쇄 매체의 물질성, 촉각성, 그리고 감각적 지연에 주목합니다. 전술적 출판이 이러한 인쇄의 감각적 특성에 강하게 의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디지털 매체가 여전히 특정 감각적 차원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쇄가 전술적 개입에 가장 효과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일까요?
저는 이 책 1장에서 인간의 감각이 디지털과 인쇄 환경에서의 독서 행위에 각각 어떻게 개입하는지 최대한 신중하고 과학적으로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인쇄물이 훨씬 더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디지털 독서는 상대적으로 결핍된 상태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저는 출판사의 전술적인 의도가 적절한 감각적 참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러한 참여는 디지털보다 인쇄물에서 훨씬 더 깊게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차원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죠. 자료에 접근하고, 공유하며, 인쇄된 책을 접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잠재적 독자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디지털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히 결합할 때 전술적 출판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전술은 대부분 소규모 실천과 연결되며, 확장성과 지속가능성과는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전술적 출판은 의도적으로 소규모에 머무르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형태의 확장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전술이 확장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소규모 실천은 더 많은 주체가 참여하며 증식할 수 있습니다. 전술적 출판에서는 이를 통해 광범위한 협력이 가능해지고, 더 큰 영향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죠. 이러한 수평적이고 조직적인 협력은 과거에도, 특히 공유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적이 있고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종종 온라인 참여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소규모를 기반으로 한 확장 가능성을 옹호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 네트워크는 그 규모와 협력 방식에서 주목할 만한데, 우리는 그 모델로부터 배우되 규모는 작게 유지하면서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속가능성과 관리 가능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언제든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남기게 되죠.
인스타그램은 최근 사진 중심 매체에서 영상 중심 플랫폼으로 급격히 전환되었고, 이제 “현실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이미지조차 왜곡된 감각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AI가 생성한 텍스트, 이미지, 영상이 급증하면서, 출판이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 보존하는 매체로서 점점 쓸모 없어지는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전술적 출판은 이러한 출판의 ‘무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출판 자체를 해체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일까요?
현재의 상황에서 출판은 전술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무용하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 생성물을 포함한 온라인 콘텐츠의 폭발적 증가는 우리가 정보라고 부르던 것을 대부분 쓸모없는 시각적·텍스트적 잔여물로 오염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나 오독으로 이어질 경우 해로운 것이 될 수 있죠. 이러한 오염에 맞설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전문적인 인간 편집 과정을 거쳐 검증된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확장성의 측면에서 보면, 통제할 수 없을 규모의 생성 콘텐츠가 온라인 세계를 점유하고 있지만 물리적 세계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인쇄 매체가 그 어느 때보다 전술적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맥락에서 출판은 관료주의나 검열, 반민주주의적 체제와 같은 구조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이러한 조건은 전술적 개입이 가장 긴급하고 급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죠. 이러한 맥락에서 전술적 출판이 단순한 우회나 생존을 넘어 제도 자체를 교란하거나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또한 이러한 전술이 지역적 맥락을 넘어 초국적 혹은 지역 간 연대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전술적 출판’은 항상 문제적인 환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공식적인 규칙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의 일부를 이루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3장에서 저는 과거 활동가들이 권력을 조롱하기 위해 탈진실을 활용했고, 적어도 문화적 차원에서 그것을 교란하는 데 기여한 여러가지 사례를 다루었습니다. 물론 출판의 역할은 생각이나 사실, 의견,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에 있고, 이는 때로 긍정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일부 경우에는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죠. 이러한 체제의 선전 기계를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며, 여기에 지속적이고 대안적인 문화적 경로가 결합될 때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찰력 있는 출판자들은 오래전부터 초지역적 관점에서 협력해왔고, 국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텍스트를 자국어로 번역하며 초국적 연대를 구축해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립 출판자들은 상호의존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전술적 출판은 출판자와 인간 모두를 잇는 상호의존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 인터뷰는 《전술적 출판》 한국어판 출간에 앞서 2026년 4월, 역자와 저자가 서면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역자 후기
알레산드로 루도비코의 신작 《전술적 출판》(2024, MIT 프레스)을 한국어로 옮겼다. 약 10년 전 그의 전작인 《포스트디지털 프린트》를 번역했던 인연이 이번 신작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 두텁고 단단한 책을 붙들고 씨름하며 번역하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몇 가지 질문과 생각들을 남기려 한다.
《전술적 출판》은 전작의 궤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책이다. 종이책과 디지털 매체의 관계, 출판의 미래, 그리고 멸종 위기종 취급을 받는 책이 오늘날 어떤 생존 방식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전작에 등장했던 몇몇 사례들이 이번 책에도 다시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사이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 우리의 일상과 정보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루도비코는 다년간 미디어 아트 전문지 《뉴럴》의 편집자로 활동하며 축적한 생생한 사례들을 통해, 가짜 뉴스와 ‘개소리’가 판치는 탈진실의 시대를 집요하게 해부해 나간다.
과거의 ‘가짜 신문 발행’이나 ‘문화 교란’ 같은 예술적 실천들은 주류 미디어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자 일종의 유희적 개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탈진실은 더 이상 귀여운 실험이 아니다. 빅테크의 알고리즘 안에서 가짜 뉴스와 혐오 선전은 빛의 속도로 퍼지고, 자본과 정치 권력은 이를 너무나 정교하게 기획하고 소비한다. 루도비코가 보여주는 수많은 아카이브는 이 풍경이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우리가 알던 출판과 미디어 생태계 전체를 뒤흔드는 구조적 전환임을 증명한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루도비코의 전방위적인 예술사적 관심에서 나온다. 그는 다다, 초현실주의, 비트 세대, 플럭서스로 이어지는 20세기 전위 예술의 계보를 오늘날의 독립출판 실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해낸다. 난니 발레스트리니나 예스 맨 같은 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체제의 통제선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정치적·기술적 개입이었다. 이 맥락 안에서 출판은 더 이상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형식이 아니다. 권력의 질서를 비틀고 개입하기 위한 전술적 매체로 다시 등장한다.
플랫폼 중심의 정보 환경은 인간의 판단과 신뢰 구조를 무너뜨린다. 오늘날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는 점점 더 자동화된 추천 시스템과 알고리즘에 의해 조직된다. 그 안에서 느린 검증 과정, 편집자의 판단, 도서관의 분류 체계, 공동체 내부의 비공식적인 지식 교환 같은 오래된 인간적 매개 구조들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난다. 루도비코가 강조하는 ‘전술’이 결국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연결망과 감각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처럼 읽히는 이유이다.
여기까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알다시피 나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그저 서점과 출판사를 운영하며 아시아 지역의 소규모 독립출판 지형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고, 현장 실천가들과 느슨한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일을 해왔다. 그런 입장에서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세련된 서구의 미디어 이론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공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처한 출판 조건 속에서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에 가까웠다.
책 제목이자 핵심 키워드인 “전술”이라는 개념은 1990년대 넷타임의 ‘전술적 미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전술은 거대한 플랫폼과 자본이 채택하는 “전략”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를 파고들며 제한된 조건 안에서 작동하는 게릴라적 실천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독립출판의 많은 실천들은 단순한 문화 활동이 아니라, 플랫폼 중심의 정보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번역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루도비코가 속한 지식 환경에서는 영어가 중심이고 번역은 어느 정도 부차적인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학문적 영역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영어를 습득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번역을 지속하는 이유는 이러한 지식과 담론을 보다 넓은 독자들과 연결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이 책에 등장하는 레퍼런스들을 살펴보자면, 이들 중 상당수는 유럽과 미국 중심의 맥락에 기반하고 있다. 가끔 한국인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한병철이나 이은영처럼 이미 서구의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다. 저자가 자신이 속한 환경 안에서 사례를 수집하고 서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루도비코의 지도 바깥을 언급하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넓히거나 지역적 안배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경고한 ‘알고리즘과 빅테크에 의한 신뢰 구조의 붕괴’라는 위기, 그리고 이에 저항하기 위한 ‘인간 네트워크의 복원’이라는 핵심 문제의식이 지금 가장 날 선 형태로 작동하는 현장이 바로 그 지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2024년 중국 광저우를 방문했을 때 만난 독립 출판인들과 리소그래프 커뮤니티가 딱 그랬다. 그들은 국가의 검열과 거대 플랫폼의 통제라는 가장 극단적인 정보 환경 속에서 매우 미시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의 실천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창한 선언이나 요란한 제스처 대신, 작은 팸플릿과 비공식 유통망, 짧은 시간 동안만 열리는 임시 전시와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움직임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책들은 공개적으로 유통되지 못했고, 어떤 출판물들은 소규모 모임 안에서만 조심스럽게 공유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제한된 조건 속에서 더욱 정교한 우회 방식과 생존 전략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출판은 미학적 유희 이전에, 루도비코가 그토록 강조한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신뢰 가능한 인간적 매개 구조’를 몸으로 밀어붙이며 서로를 연결하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 가까웠다.
이러한 풍경은 비단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남아시아의 소규모 리소그래프 커뮤니티, 대안적인 유통망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독립 서점과 북페어의 기획자들, 검열과 자본의 압박 속에서 자생적으로 작동하는 협업 구조들 역시 이 책이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 또 다른 출판의 장면들이다. 어쩌면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전술은 거대한 플랫폼과 속도의 논리 바깥에서 인간 네트워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의 역할은 다시 중요해진다. 번역은 외부의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단순한 전달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거대 담론과 우리 지역 현실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기존의 기록이 놓쳐버린 맥락들을 다시 호출하는 과정에 가깝다. 개인적으로 이번 번역은 루도비코가 보여준 개념과 실천들을 나 스스로의 맥락 안에서 다시 조직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역시 하나의 전술적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지금 한국의 디지털 유통 환경은 몇 개의 거대한 플랫폼과 알고리즘 위에서 매우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책은 점점 더 짧은 영상과 즉각적인 반응 속에서 소비되고, 독립출판 역시 이러한 속도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작은 출판사와 서점들조차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수와 거대 유통망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느린 읽기와 우회적인 유통, 작은 공동체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번역과 출판은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루도비코의 문제 의식을 경유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 출판》을 번역하는 일은 예상대로 꽤 고된 작업이었다. 기술 이론과 미디어 비평, 서양 예술사적 맥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책인 만큼, 어떤 개념들은 끝내 한국어 안으로 매끄럽게 안착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가능한 한 읽기 쉬운 문장을 만들고자 했지만, 여전히 낯설고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번역자의 미숙함 탓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지금 한국의 독자들에게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출판 지형에 작은 균열을 내는 전술적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임경용)
2026년 6월 발간 예정인 알레산드로 루도비코의 신간 《전술적 출판》 발간에 맞춰 진행한 서면 인터뷰 내용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구조를 조금 더 엿볼 수 있도록 상세 목차 역시 함께 공개합니다.
그의 전작 《포스트디지털 프린트》가 인쇄 문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디지털’ 출판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것의 필요와 불필요를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했다면, 이번 책은 그 연장선에서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맥락 속에서 출판의 전술적 위치를 고민합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목차만 보더라도 이 책이 무엇을 언급하고, 어떤 사례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게 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 출판과 AI가 초래한 정보의 범람은 출판이 지닌 신뢰 자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도비코가 전작부터 일관되게 강조해온 것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번 책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제안하는 ‘기계적 글쓰기’를 넘어선 ‘기계와 함께 글쓰기’ 역시 단순한 기술 낙관론처럼 읽히지는 않습니다.
루도비코 책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례들을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의 가치 중 절반 이상이 이러한 사례들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뉴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접했던 급진적 출판의 흐름과, 어쩌면 기존의 의미에서 ‘출판’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실험들을 20세기 초반부터 현재까지 폭넓게 가로지르며 소개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책의 부록인 「21세기를 위한 출판 실험 100선 주석 목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 수록된 100권의 책은 단순히 ‘실험적’인 책들의 목록이라기보다, 인간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디까지 사고와 감각을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개념적 주기율표처럼 보입니다. 현실의 원소들을 배열한 지도가 주기율표라면, 여기 제시된 책들은 우리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감각의 장소들을 배열한 지도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이 책은 대중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 대부분이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은 출판이 어떠한 방식으로 다시 신뢰 가능한 읽기와 정보의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질문하게 만듭니다. 루도비코가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은 단순한 출판 실험의 기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출판 문화를 오늘의 조건 속에서 다시 작동시키기 위한 전략들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그는 소규모 출판과 독립출판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그리고 탈진실의 풍경 속에서 출판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도 함께 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적 출판》은 단순히 출판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오늘날 책과 읽기, 정보와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하나의 실천적 제안처럼 읽힙니다.
목차
닉 몽포르의 서문
서론
1 감각의 영역
인쇄물의 촉각적 모사
후각, 청각, 시각 안에서 디지털 독서 경험
후각, 청각, 시각을 통한 인쇄물 독서 경험
인쇄물과 디지털 독서에서 촉각
주요한 읽기 인터페이스로서의 촉각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기: 정보로서의 박테리아
정보의 물질적 공간
감각적으로 확장된 출판의 한 사례: 출판과 음악의 유희적 접속
소리는 인쇄물을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구술문화를 죽인 후에)
종이 위의 소리
소리를 내는 출판물과 일시적 아날로그 미디어
소리를 내는 출판물과 일시적 디지털 미디어
현대 출판물에서 기술 중심의 아날로그 미디어
음악 잡지 읽기 경험
2 비인간적 글쓰기
그럴듯함: 조합적 글쓰기
난니 발레스트리니: "테이프 마크 1"
울리포: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신뢰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기술적 맥락
문학 트윗봇: 직장에서 소프트웨어 작성
대화 도구로서의 ‘인식되지 않은 문학’
저자성: 어쩌면 이 장은 기계가 쓴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와 함께 글쓰기: 지원 시스템으로서의 기계
3 행동주의 탈진실 출판
불확실성 시대의 조작적 출판
금지된 출판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이후의 가짜 신문
일 말레: 1970년대의 가짜 신문
예스 맨: 새로운 밀레니엄의 가짜 신문
뉴스 형식과 프레임워크의 중요성
가짜 출판의 전환: 비판적 예술에서 탈진실 시대의 효과적인 조작으로
저자성, 리믹스 그리고 딥페이크
신뢰할 수 있는 인간 네트워크
출처와 맥락의 붕괴
정보의 속도와 개인적 정보 댐
개인적인 신뢰 네트워크
인간 그물망 네트워크
4장 무한함: 디지털 출판의 패러다임
공간없는 책을 찾아서: 전자 출판 고고학
무한 출판의 역사
공상 과학 소설의 비전
콘텐츠 공간의 디지털적인 무한 붕괴
끝없는 출판 패러다임: 공간, 시간, 기억
즉시 출판의 무한 패러다임
끝없는 흐름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시각적으로 멈추지 않는 온라인 시간 여행
읽기 능력의 한계
모든 것이 뉴스다: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하기 위한 정보의 파편화
새로운 방송 형식의 부상
아티스트 출판물에서 실제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렌더링
끝없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5장 문화적 게릴라로서 도서관
새로운 도서관의 중추적인 역할
기념비적 자산으로서 도서관
관리자와 보편적 도서관
인터넷을 인쇄하기
예술가의 도서관
수행적 공간으로서 도서관
또 다른 문화적 지형: 독립 도서관과 DIY 도서관
분산된 도서관
임시 도서관
경계의 사서적 실천
임시 도서관의 이론과 실천
주술사로서의 사서
6장 21세기에 우리는 어떻게 출판해야 하는가
우리는 새로운 출판 생태계에 있다
시공간의 생태학
기계의 생태학
유통의 생태학
역장의 생태학
출판의 헤테로토피아를 향해
감사의 말
부록: 21세기를 위한 출판 실험 100선 주석 목록
참고문헌
알레한드로 루도비코 인터뷰
알레한드로 루도비코 인터뷰
이 책에서 “전술”은 하나의 방법론이라기보다, 오늘날의 제도적·경제적·기술적 조건이 부과한 실천의 형식처럼 보입니다. 선생님은 ‘전술적 출판’을 의식적으로 선택된 전략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동시대 출판 환경이 강제한 결과로 보시나요?
어느 정도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책에서 살펴본 것처럼 출판에서 전술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접근과 유통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여기서 “전술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상업적 인쇄와 유통이 전제하는 표준적인 개념적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의미하죠. 다른 한편으로, 특히 독립 출판자들에게 전술적 태도는 두 가지 종류의 문화적 범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머신러닝 기반 AI가 만들어내는 훨씬 더 거대한 생산물입니다. 따라서 지속 가능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영감을 주는 출판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은, 제가 보기에, 21세기 오늘날 가장 전략적인 출판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술은 유연하고 기민하지만, 반복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이나 공식으로 굳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전술적 출판이 스스로를 잠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할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대답하자면, 전반적으로 당신의 지적은 옳습니다. 전술은 효과를 발휘할 때 유효하며, 역사적으로 볼 때 전술은 그것이 작동하는 맥락과 조건이 변화하거나 산업에 의해 흡수되면서 점차 효과를 잃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그 개념적 힘은 더 오래 지속되며, 조금 수정되거나 혹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구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전술의 유연성과 기민함은 그것이 결코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할 때 보존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 환경에서 하나의 종이 생존을 위해 적응하듯이 변화해야 합니다. 전술적 출판은 문화적 환경과 시장의 역학을 이해하고, 독립적인 사유와 출판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취할 때, 전술적 출판은 스스로를 잠식하지 않고 번성해왔습니다.
당신은 디지털 환경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인쇄 매체의 물질성, 촉각성, 그리고 감각적 지연에 주목합니다. 전술적 출판이 이러한 인쇄의 감각적 특성에 강하게 의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디지털 매체가 여전히 특정 감각적 차원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쇄가 전술적 개입에 가장 효과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일까요?
저는 이 책 1장에서 인간의 감각이 디지털과 인쇄 환경에서의 독서 행위에 각각 어떻게 개입하는지 최대한 신중하고 과학적으로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인쇄물이 훨씬 더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디지털 독서는 상대적으로 결핍된 상태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저는 출판사의 전술적인 의도가 적절한 감각적 참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러한 참여는 디지털보다 인쇄물에서 훨씬 더 깊게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차원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죠. 자료에 접근하고, 공유하며, 인쇄된 책을 접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잠재적 독자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디지털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히 결합할 때 전술적 출판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전술은 대부분 소규모 실천과 연결되며, 확장성과 지속가능성과는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전술적 출판은 의도적으로 소규모에 머무르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형태의 확장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전술이 확장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소규모 실천은 더 많은 주체가 참여하며 증식할 수 있습니다. 전술적 출판에서는 이를 통해 광범위한 협력이 가능해지고, 더 큰 영향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죠. 이러한 수평적이고 조직적인 협력은 과거에도, 특히 공유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적이 있고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종종 온라인 참여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소규모를 기반으로 한 확장 가능성을 옹호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 네트워크는 그 규모와 협력 방식에서 주목할 만한데, 우리는 그 모델로부터 배우되 규모는 작게 유지하면서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속가능성과 관리 가능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언제든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남기게 되죠.
인스타그램은 최근 사진 중심 매체에서 영상 중심 플랫폼으로 급격히 전환되었고, 이제 “현실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이미지조차 왜곡된 감각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AI가 생성한 텍스트, 이미지, 영상이 급증하면서, 출판이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 보존하는 매체로서 점점 쓸모 없어지는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전술적 출판은 이러한 출판의 ‘무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출판 자체를 해체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일까요?
현재의 상황에서 출판은 전술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무용하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 생성물을 포함한 온라인 콘텐츠의 폭발적 증가는 우리가 정보라고 부르던 것을 대부분 쓸모없는 시각적·텍스트적 잔여물로 오염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나 오독으로 이어질 경우 해로운 것이 될 수 있죠. 이러한 오염에 맞설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전문적인 인간 편집 과정을 거쳐 검증된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확장성의 측면에서 보면, 통제할 수 없을 규모의 생성 콘텐츠가 온라인 세계를 점유하고 있지만 물리적 세계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인쇄 매체가 그 어느 때보다 전술적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맥락에서 출판은 관료주의나 검열, 반민주주의적 체제와 같은 구조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이러한 조건은 전술적 개입이 가장 긴급하고 급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죠. 이러한 맥락에서 전술적 출판이 단순한 우회나 생존을 넘어 제도 자체를 교란하거나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또한 이러한 전술이 지역적 맥락을 넘어 초국적 혹은 지역 간 연대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전술적 출판’은 항상 문제적인 환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공식적인 규칙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의 일부를 이루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3장에서 저는 과거 활동가들이 권력을 조롱하기 위해 탈진실을 활용했고, 적어도 문화적 차원에서 그것을 교란하는 데 기여한 여러가지 사례를 다루었습니다. 물론 출판의 역할은 생각이나 사실, 의견,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에 있고, 이는 때로 긍정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일부 경우에는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죠. 이러한 체제의 선전 기계를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며, 여기에 지속적이고 대안적인 문화적 경로가 결합될 때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찰력 있는 출판자들은 오래전부터 초지역적 관점에서 협력해왔고, 국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텍스트를 자국어로 번역하며 초국적 연대를 구축해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립 출판자들은 상호의존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전술적 출판은 출판자와 인간 모두를 잇는 상호의존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 인터뷰는 《전술적 출판》 한국어판 출간에 앞서 2026년 4월, 역자와 저자가 서면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역자 후기
알레산드로 루도비코의 신작 《전술적 출판》(2024, MIT 프레스)을 한국어로 옮겼다. 약 10년 전 그의 전작인 《포스트디지털 프린트》를 번역했던 인연이 이번 신작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 두텁고 단단한 책을 붙들고 씨름하며 번역하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몇 가지 질문과 생각들을 남기려 한다.
《전술적 출판》은 전작의 궤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책이다. 종이책과 디지털 매체의 관계, 출판의 미래, 그리고 멸종 위기종 취급을 받는 책이 오늘날 어떤 생존 방식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전작에 등장했던 몇몇 사례들이 이번 책에도 다시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사이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 우리의 일상과 정보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루도비코는 다년간 미디어 아트 전문지 《뉴럴》의 편집자로 활동하며 축적한 생생한 사례들을 통해, 가짜 뉴스와 ‘개소리’가 판치는 탈진실의 시대를 집요하게 해부해 나간다.
과거의 ‘가짜 신문 발행’이나 ‘문화 교란’ 같은 예술적 실천들은 주류 미디어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자 일종의 유희적 개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탈진실은 더 이상 귀여운 실험이 아니다. 빅테크의 알고리즘 안에서 가짜 뉴스와 혐오 선전은 빛의 속도로 퍼지고, 자본과 정치 권력은 이를 너무나 정교하게 기획하고 소비한다. 루도비코가 보여주는 수많은 아카이브는 이 풍경이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우리가 알던 출판과 미디어 생태계 전체를 뒤흔드는 구조적 전환임을 증명한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루도비코의 전방위적인 예술사적 관심에서 나온다. 그는 다다, 초현실주의, 비트 세대, 플럭서스로 이어지는 20세기 전위 예술의 계보를 오늘날의 독립출판 실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해낸다. 난니 발레스트리니나 예스 맨 같은 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체제의 통제선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정치적·기술적 개입이었다. 이 맥락 안에서 출판은 더 이상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형식이 아니다. 권력의 질서를 비틀고 개입하기 위한 전술적 매체로 다시 등장한다.
플랫폼 중심의 정보 환경은 인간의 판단과 신뢰 구조를 무너뜨린다. 오늘날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는 점점 더 자동화된 추천 시스템과 알고리즘에 의해 조직된다. 그 안에서 느린 검증 과정, 편집자의 판단, 도서관의 분류 체계, 공동체 내부의 비공식적인 지식 교환 같은 오래된 인간적 매개 구조들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난다. 루도비코가 강조하는 ‘전술’이 결국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연결망과 감각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처럼 읽히는 이유이다.
여기까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알다시피 나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그저 서점과 출판사를 운영하며 아시아 지역의 소규모 독립출판 지형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고, 현장 실천가들과 느슨한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일을 해왔다. 그런 입장에서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세련된 서구의 미디어 이론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공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처한 출판 조건 속에서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에 가까웠다.
책 제목이자 핵심 키워드인 “전술”이라는 개념은 1990년대 넷타임의 ‘전술적 미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전술은 거대한 플랫폼과 자본이 채택하는 “전략”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를 파고들며 제한된 조건 안에서 작동하는 게릴라적 실천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독립출판의 많은 실천들은 단순한 문화 활동이 아니라, 플랫폼 중심의 정보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번역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루도비코가 속한 지식 환경에서는 영어가 중심이고 번역은 어느 정도 부차적인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학문적 영역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영어를 습득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번역을 지속하는 이유는 이러한 지식과 담론을 보다 넓은 독자들과 연결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이 책에 등장하는 레퍼런스들을 살펴보자면, 이들 중 상당수는 유럽과 미국 중심의 맥락에 기반하고 있다. 가끔 한국인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한병철이나 이은영처럼 이미 서구의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다. 저자가 자신이 속한 환경 안에서 사례를 수집하고 서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루도비코의 지도 바깥을 언급하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넓히거나 지역적 안배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경고한 ‘알고리즘과 빅테크에 의한 신뢰 구조의 붕괴’라는 위기, 그리고 이에 저항하기 위한 ‘인간 네트워크의 복원’이라는 핵심 문제의식이 지금 가장 날 선 형태로 작동하는 현장이 바로 그 지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2024년 중국 광저우를 방문했을 때 만난 독립 출판인들과 리소그래프 커뮤니티가 딱 그랬다. 그들은 국가의 검열과 거대 플랫폼의 통제라는 가장 극단적인 정보 환경 속에서 매우 미시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의 실천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창한 선언이나 요란한 제스처 대신, 작은 팸플릿과 비공식 유통망, 짧은 시간 동안만 열리는 임시 전시와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움직임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책들은 공개적으로 유통되지 못했고, 어떤 출판물들은 소규모 모임 안에서만 조심스럽게 공유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제한된 조건 속에서 더욱 정교한 우회 방식과 생존 전략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출판은 미학적 유희 이전에, 루도비코가 그토록 강조한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신뢰 가능한 인간적 매개 구조’를 몸으로 밀어붙이며 서로를 연결하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 가까웠다.
이러한 풍경은 비단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남아시아의 소규모 리소그래프 커뮤니티, 대안적인 유통망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독립 서점과 북페어의 기획자들, 검열과 자본의 압박 속에서 자생적으로 작동하는 협업 구조들 역시 이 책이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 또 다른 출판의 장면들이다. 어쩌면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전술은 거대한 플랫폼과 속도의 논리 바깥에서 인간 네트워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의 역할은 다시 중요해진다. 번역은 외부의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단순한 전달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거대 담론과 우리 지역 현실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기존의 기록이 놓쳐버린 맥락들을 다시 호출하는 과정에 가깝다. 개인적으로 이번 번역은 루도비코가 보여준 개념과 실천들을 나 스스로의 맥락 안에서 다시 조직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역시 하나의 전술적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지금 한국의 디지털 유통 환경은 몇 개의 거대한 플랫폼과 알고리즘 위에서 매우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책은 점점 더 짧은 영상과 즉각적인 반응 속에서 소비되고, 독립출판 역시 이러한 속도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작은 출판사와 서점들조차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수와 거대 유통망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느린 읽기와 우회적인 유통, 작은 공동체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번역과 출판은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루도비코의 문제 의식을 경유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 출판》을 번역하는 일은 예상대로 꽤 고된 작업이었다. 기술 이론과 미디어 비평, 서양 예술사적 맥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책인 만큼, 어떤 개념들은 끝내 한국어 안으로 매끄럽게 안착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가능한 한 읽기 쉬운 문장을 만들고자 했지만, 여전히 낯설고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번역자의 미숙함 탓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지금 한국의 독자들에게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출판 지형에 작은 균열을 내는 전술적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임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