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오늘날 습관으로 간주하는 것들은 한때 충격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듯이 기술과 산업의 발전으로 일상 세계에 변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미래를 현재로 번역해보려는 도박사들의 내기가 펼쳐진다. 그 예언적인 담론에 편승하면 세계의 가능성은 닫히지만 그것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이번 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_오큘로_ 5호의 첫 번째 특집은 동시대 매체 환경을 체화된 언어로 구사하는 작가들과의 만남이다. 이번 호에서는 임고은, 장우진, 함정식, 정재훈과의 대담을 준비했다. 이들은 1980년대 태생이라는 이유로 디지털 네이티브로 묶일 수도 있지만 그것 외에는 각자 지향하는 작업 방식과 세계관에서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다. 다만 이들은 무빙이미지가 지나 온 역사적 맥락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역사를 중첩시키고 시효가 끝난 것으로 판명된 낡고 단조로운 형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 사건, 대상, 풍경의 형질 변화를 스크린에 옮기는 것이 이들 작품을 관통하는 가족 유사성이다. 이 네 편의 대담을 교직해보면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조류가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판별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 특집으로 무빙이미지 플랫폼에 대한 네 편의 안내문을 준비했다. 역사적, 미학적, 사회적으로 열린 공간을 추구하는 이 네 플랫폼은 단순히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넘어 무엇을 어떤 관점으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베를린다큐멘터리포럼은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실천과 언어를 간학제적인 큐레토리얼 및 비평적 접근을 통해 탐구한다. 라이트인더스트리는 미국 소규모 상영공간의 계보를 이어나가면서 영화관이 사회적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비전 하에 실험영화, 극영화, 비디오, 시각 예술, 다큐멘터리, 뉴미디어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한다. 온라인 플랫폼 브이드롬은 인터넷이 작품의 전시, 상영, 유통에 미치는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하는 동시에 오프라인에 국한된 상영과 전시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끝으로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은 아카이빙, 상영, 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고전영화, 실험영화, 독립영화의 경계를 허물어뜨려 대안적인 정전을 창출하고자 한다.
무빙이미지의 현재는 축적된 역사와의 끊임없는 질문, 의심, 대화, 대결 속에서 생성된다. 먼저 인터뷰에 실린 김동원 감독과의 대담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내 친구 정일우›로 돌아온 김동원 감독」에 주목하길 바란다. 안건형 감독은 김동원 감독을 둘러싼 지난날의 평가가 신화화되었음을 지적하고, 그의 영화적 형식이 보여주기가 아니라 들려주기에 있음을 강조한다. 김동원 감독의 신작 ‹내 친구 정일우›의 제작 배경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크리틱에 실린 이도훈의 「문지기의 임무: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 프로그래밍에 대하여」는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이 정전의 정치학, 취향의 정치학, 규모의 정치학을 관성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름 없는 영화의 지위 복권과 영화 문화의 지정학적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 두 글은 영화의 담론은 닫히고 고정될 때가 아니라 열리고 흐를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빛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번 호 리뷰는 특집에 버금갈 정도로 풍성하다. 김응수의 ‹옥주기행›, 켄 번스의 ‹남북전쟁›, 존 지안비토의 ‹비행운(클락)›과 ‹항적(수빅)›, 클레베르 멘동사 필류의 ‹아쿠아리우스›에 대해 밀도 있는 리뷰를 보내준 필자들 모두 영화의 존재론적 기능에 대해 고민한다. 이들은 영화가 기억, 역사, 현실을 환기시키는 매체라는 지점에 주목하고 그것이 영화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을 동시대적 맥락과 겹쳐 놓는다. 대미를 장식하는 김보년의 글은 로메르가 영화에 관해 쓴 글 모음집인 _The Taste for Beauty_에 대한 리뷰이다. 로메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영화를 통해 낯설고 불길한 감각을 일깨우는 ‘이상한’ 감독이지만, 그의 다채로운 이력도 예술의 진화론적 발전과 그것의 순환적 주기를 믿고 따르는 그의 영화관 안에서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무빙이미지의 생태계는 전쟁터인 동시에 놀이터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둘러싼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창과 방패 놀이를 하는 이 장소는 불길한 긴장이 언제든 환희의 전율로 바뀔 수 있는 곳이다.
(이도훈)
목차
Front
003 이도훈
특집 1: 시네마 이후, 우리 눈에 비치는 세계: 네 개의 대화
009 이한범 중첩된 세계의 안팎에서: 임고은 작가와의 대화
016 이도훈 시간의 흐름과 마음의 풍경을 찍다: 장우진 감독과의 대화
025 김민엽 프레임을 만지면서 비디오 보기: 함정식 작가와의 대화
036 강덕구 모험, 산, 환상방황, 개, 소음, 빛: 정재훈 감독과의 대화
특집 2: 무빙이미지 플랫폼
043 김신재 베를린다큐멘터리포럼 Berlin Documentary Forum
046 이한범 라이트인더스트리 Light Industry
050 박가은 브이드롬 Vdrome
053 강덕구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 Austrian Film Museum
Interview
059 안건형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내 친구 정일우›로 돌아온 김동원 감독
Critic
075 이도훈 문지기의 임무: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에 대하여
Review
087 권은혜 ‹옥주기행›의 음악적 체험에 대하여
091 권세미 잃어버린 기록에 대한 애도의 시간: 켄 번스의 ‹남북전쟁›
096 박진희 평화를 위한 병참학: 존 지안비토의 ‹비행운(클락)›과
‹항적(수빅)›
100 유지완 영화는 위태로운 장소에 산다: 클레베르 멘동사 필류의
‹아쿠아리우스›
104 김보년 이상한 감독, 에릭 로메르: The Taste for Beauty‑를 읽으면서
책 속에서
“경계가 분명한 것보다는 모호한 것이 실제와 더 가깝고 우리의 지각과 기억은 늘 불완전하므로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해요.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중첩된 경계에서 실험하다 보면 다르다 구분되던 것들이 또 다른 다름으로 변모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향수에 젖어 아날로그 필름만 고집한다거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영상을 쫓아가지 않고, 두 매체 각각의 성향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동등하게 다루고 싶어요. 이 두 매체가 만나는 지점이 제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니까요.“
(“중첩된 세계의 안팎에서: 임고은 작가와의 대화”, 《오큘로》 005호, 13쪽)
“카메라가 무언가에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의도를 발생시키잖아요. 예를 들어 줌인해서 뭔가를 확대해서 보여주면 카메라에 존재감이 생기고 또 그에 따른 효과가 발생하겠죠.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제하면 결국 관객의 선택권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해요. ‹춘천, 춘천›은 풀숏, 롱숏, 그리고 미디엄숏 위주예요. 영화 속 인물의 감정과 관련된 문제도 있고, 또 가급적 영화 속 인물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썼죠. 그리고 풍경이 중요했어요. 마음의 풍경이라고 할까. 지현의 실루엣, 소양강 댐의 안개, 청평사의 큰 은행나무의 외적인 풍경이 관객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어요..”
(“시간의 흐름과 마음의 풍경을 찍다: 장우진 감독과의 대화”, 《오큘로》 005호, 21쪽)
“영상의 형식에 집중했었던 초기의 작업에서는 즉물적인 것 혹은 딱 이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각 같은 것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지 서사나 해석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찬송가 시리즈를 ‹기도›라는 드라마 형식으로 찍고 나서 형식적인 부분들에 집중하고 있다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했던 것이 경마였어요. 하지만 경마 다큐멘터리를 전시로 풀어낸 것은 아니죠. 경마 내용을 알리는 것보다는 경마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형식에 대한 이전 작업의 각기 다른 고민을 함께 끌고 온 것이 이번 작업이에요. 이 연장선상에서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경마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본 것이죠. 그런데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영상들을 보면서 그 관점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관조하는 것도, 개입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럴 때 나는 이것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경마에 전혀 흥미가 없다 보니.”
(“프레임을 만지면서 비디오 보기: 함정식 작가와의 대화”, 《오큘로》 005호, 31쪽)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현상을 겪은 건 제가 휴가를 갔던 때입니다. 긴 휴가 중에 산에 올라갔을 때였죠.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해 뜨고 정오까지 시간은 가는데 저는 분명히 걸어간다고 열심히 걷는데도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어요. 이런 경험을 떠올리면서 이것을 영화와 어떻게 조화시켜볼까라는 생각으로 작업했던 것 같습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쇼트는 영화에서 필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영화를 잘 봐주셨던 것 같습니다. ‹호수길›, ‹환호성› 그리고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까지 작업하면서 저는 전형성을 자꾸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누구는 제가 음치에 박치라서 본연의 기질이 나오는 것뿐이라고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하나로 전형화되지 않는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제게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영화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모험, 산, 환상방황, 개, 소음, 빛: 정재훈 감독과의 대화”, 《오큘로》 005호, 40쪽)
“영화 프로그래밍은 이름 없는 영화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영화 정전의 정치학을 통해 영화사 전반에 걸쳐서 소외와 배제가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 영화를 표현주의 영화로 환원하는 식의 교과서적인 이해는 개별 작가와 작품들의 독창성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재단한다. 보편적인 앎의 힘이 이름 없는 영화들을 억압하고 추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사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면서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아카이빙, 프로그래밍, 큐레이팅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대 영화 문화의 지정학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중일 중심의 동북아시아 영화가 영화사에 편입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아직 많은 지역의 영화들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자리에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로 특정 지역을 조명하는 프로그래밍이 필요하다…(중략) 끝으로, 영화의 미래에 대한 비평적 내기가 필요하다. 후기 자본주의 및 금융 자본주의, 테러리즘과 인종 문제로 격화되고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 전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환경 문제, 제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 그리고 디지털 문화와 인터넷 문화를 기반으로 한 포스트시네마 등은 동시대 영화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할 조건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시네 테크와 영화제는 새로운 테마, 슬로건, 의제를 설정해야 하는 당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도훈, “문지기의 임무: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에 대하여”, 《오큘로》 005호, 83~84쪽)
책 소개
오늘날 습관으로 간주하는 것들은 한때 충격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듯이 기술과 산업의 발전으로 일상 세계에 변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미래를 현재로 번역해보려는 도박사들의 내기가 펼쳐진다. 그 예언적인 담론에 편승하면 세계의 가능성은 닫히지만 그것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이번 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_오큘로_ 5호의 첫 번째 특집은 동시대 매체 환경을 체화된 언어로 구사하는 작가들과의 만남이다. 이번 호에서는 임고은, 장우진, 함정식, 정재훈과의 대담을 준비했다. 이들은 1980년대 태생이라는 이유로 디지털 네이티브로 묶일 수도 있지만 그것 외에는 각자 지향하는 작업 방식과 세계관에서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다. 다만 이들은 무빙이미지가 지나 온 역사적 맥락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역사를 중첩시키고 시효가 끝난 것으로 판명된 낡고 단조로운 형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 사건, 대상, 풍경의 형질 변화를 스크린에 옮기는 것이 이들 작품을 관통하는 가족 유사성이다. 이 네 편의 대담을 교직해보면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조류가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판별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 특집으로 무빙이미지 플랫폼에 대한 네 편의 안내문을 준비했다. 역사적, 미학적, 사회적으로 열린 공간을 추구하는 이 네 플랫폼은 단순히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넘어 무엇을 어떤 관점으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베를린다큐멘터리포럼은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실천과 언어를 간학제적인 큐레토리얼 및 비평적 접근을 통해 탐구한다. 라이트인더스트리는 미국 소규모 상영공간의 계보를 이어나가면서 영화관이 사회적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비전 하에 실험영화, 극영화, 비디오, 시각 예술, 다큐멘터리, 뉴미디어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한다. 온라인 플랫폼 브이드롬은 인터넷이 작품의 전시, 상영, 유통에 미치는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하는 동시에 오프라인에 국한된 상영과 전시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끝으로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은 아카이빙, 상영, 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고전영화, 실험영화, 독립영화의 경계를 허물어뜨려 대안적인 정전을 창출하고자 한다.
무빙이미지의 현재는 축적된 역사와의 끊임없는 질문, 의심, 대화, 대결 속에서 생성된다. 먼저 인터뷰에 실린 김동원 감독과의 대담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내 친구 정일우›로 돌아온 김동원 감독」에 주목하길 바란다. 안건형 감독은 김동원 감독을 둘러싼 지난날의 평가가 신화화되었음을 지적하고, 그의 영화적 형식이 보여주기가 아니라 들려주기에 있음을 강조한다. 김동원 감독의 신작 ‹내 친구 정일우›의 제작 배경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크리틱에 실린 이도훈의 「문지기의 임무: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 프로그래밍에 대하여」는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이 정전의 정치학, 취향의 정치학, 규모의 정치학을 관성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름 없는 영화의 지위 복권과 영화 문화의 지정학적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 두 글은 영화의 담론은 닫히고 고정될 때가 아니라 열리고 흐를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빛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번 호 리뷰는 특집에 버금갈 정도로 풍성하다. 김응수의 ‹옥주기행›, 켄 번스의 ‹남북전쟁›, 존 지안비토의 ‹비행운(클락)›과 ‹항적(수빅)›, 클레베르 멘동사 필류의 ‹아쿠아리우스›에 대해 밀도 있는 리뷰를 보내준 필자들 모두 영화의 존재론적 기능에 대해 고민한다. 이들은 영화가 기억, 역사, 현실을 환기시키는 매체라는 지점에 주목하고 그것이 영화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을 동시대적 맥락과 겹쳐 놓는다. 대미를 장식하는 김보년의 글은 로메르가 영화에 관해 쓴 글 모음집인 _The Taste for Beauty_에 대한 리뷰이다. 로메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영화를 통해 낯설고 불길한 감각을 일깨우는 ‘이상한’ 감독이지만, 그의 다채로운 이력도 예술의 진화론적 발전과 그것의 순환적 주기를 믿고 따르는 그의 영화관 안에서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무빙이미지의 생태계는 전쟁터인 동시에 놀이터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둘러싼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창과 방패 놀이를 하는 이 장소는 불길한 긴장이 언제든 환희의 전율로 바뀔 수 있는 곳이다.
(이도훈)
목차
Front
003 이도훈
특집 1: 시네마 이후, 우리 눈에 비치는 세계: 네 개의 대화
009 이한범 중첩된 세계의 안팎에서: 임고은 작가와의 대화
016 이도훈 시간의 흐름과 마음의 풍경을 찍다: 장우진 감독과의 대화
025 김민엽 프레임을 만지면서 비디오 보기: 함정식 작가와의 대화
036 강덕구 모험, 산, 환상방황, 개, 소음, 빛: 정재훈 감독과의 대화
특집 2: 무빙이미지 플랫폼
043 김신재 베를린다큐멘터리포럼 Berlin Documentary Forum
046 이한범 라이트인더스트리 Light Industry
050 박가은 브이드롬 Vdrome
053 강덕구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 Austrian Film Museum
Interview
059 안건형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내 친구 정일우›로 돌아온 김동원 감독
Critic
075 이도훈 문지기의 임무: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에 대하여
Review
087 권은혜 ‹옥주기행›의 음악적 체험에 대하여
091 권세미 잃어버린 기록에 대한 애도의 시간: 켄 번스의 ‹남북전쟁›
096 박진희 평화를 위한 병참학: 존 지안비토의 ‹비행운(클락)›과
‹항적(수빅)›
100 유지완 영화는 위태로운 장소에 산다: 클레베르 멘동사 필류의
‹아쿠아리우스›
104 김보년 이상한 감독, 에릭 로메르: The Taste for Beauty‑를 읽으면서
책 속에서
“경계가 분명한 것보다는 모호한 것이 실제와 더 가깝고 우리의 지각과 기억은 늘 불완전하므로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해요.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중첩된 경계에서 실험하다 보면 다르다 구분되던 것들이 또 다른 다름으로 변모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향수에 젖어 아날로그 필름만 고집한다거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영상을 쫓아가지 않고, 두 매체 각각의 성향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동등하게 다루고 싶어요. 이 두 매체가 만나는 지점이 제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니까요.“
(“중첩된 세계의 안팎에서: 임고은 작가와의 대화”, 《오큘로》 005호, 13쪽)
“카메라가 무언가에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의도를 발생시키잖아요. 예를 들어 줌인해서 뭔가를 확대해서 보여주면 카메라에 존재감이 생기고 또 그에 따른 효과가 발생하겠죠.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제하면 결국 관객의 선택권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해요. ‹춘천, 춘천›은 풀숏, 롱숏, 그리고 미디엄숏 위주예요. 영화 속 인물의 감정과 관련된 문제도 있고, 또 가급적 영화 속 인물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썼죠. 그리고 풍경이 중요했어요. 마음의 풍경이라고 할까. 지현의 실루엣, 소양강 댐의 안개, 청평사의 큰 은행나무의 외적인 풍경이 관객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어요..”
(“시간의 흐름과 마음의 풍경을 찍다: 장우진 감독과의 대화”, 《오큘로》 005호, 21쪽)
“영상의 형식에 집중했었던 초기의 작업에서는 즉물적인 것 혹은 딱 이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각 같은 것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지 서사나 해석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찬송가 시리즈를 ‹기도›라는 드라마 형식으로 찍고 나서 형식적인 부분들에 집중하고 있다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했던 것이 경마였어요. 하지만 경마 다큐멘터리를 전시로 풀어낸 것은 아니죠. 경마 내용을 알리는 것보다는 경마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형식에 대한 이전 작업의 각기 다른 고민을 함께 끌고 온 것이 이번 작업이에요. 이 연장선상에서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경마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본 것이죠. 그런데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영상들을 보면서 그 관점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관조하는 것도, 개입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럴 때 나는 이것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경마에 전혀 흥미가 없다 보니.”
(“프레임을 만지면서 비디오 보기: 함정식 작가와의 대화”, 《오큘로》 005호, 31쪽)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현상을 겪은 건 제가 휴가를 갔던 때입니다. 긴 휴가 중에 산에 올라갔을 때였죠.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해 뜨고 정오까지 시간은 가는데 저는 분명히 걸어간다고 열심히 걷는데도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어요. 이런 경험을 떠올리면서 이것을 영화와 어떻게 조화시켜볼까라는 생각으로 작업했던 것 같습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쇼트는 영화에서 필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영화를 잘 봐주셨던 것 같습니다. ‹호수길›, ‹환호성› 그리고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까지 작업하면서 저는 전형성을 자꾸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누구는 제가 음치에 박치라서 본연의 기질이 나오는 것뿐이라고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하나로 전형화되지 않는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제게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영화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모험, 산, 환상방황, 개, 소음, 빛: 정재훈 감독과의 대화”, 《오큘로》 005호, 40쪽)
“영화 프로그래밍은 이름 없는 영화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영화 정전의 정치학을 통해 영화사 전반에 걸쳐서 소외와 배제가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 영화를 표현주의 영화로 환원하는 식의 교과서적인 이해는 개별 작가와 작품들의 독창성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재단한다. 보편적인 앎의 힘이 이름 없는 영화들을 억압하고 추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사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면서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아카이빙, 프로그래밍, 큐레이팅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대 영화 문화의 지정학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중일 중심의 동북아시아 영화가 영화사에 편입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아직 많은 지역의 영화들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자리에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로 특정 지역을 조명하는 프로그래밍이 필요하다…(중략) 끝으로, 영화의 미래에 대한 비평적 내기가 필요하다. 후기 자본주의 및 금융 자본주의, 테러리즘과 인종 문제로 격화되고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 전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환경 문제, 제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 그리고 디지털 문화와 인터넷 문화를 기반으로 한 포스트시네마 등은 동시대 영화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할 조건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시네 테크와 영화제는 새로운 테마, 슬로건, 의제를 설정해야 하는 당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도훈, “문지기의 임무: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에 대하여”, 《오큘로》 005호, 83~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