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면서
《오큘로》 8호가 나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넘었다. 정기 간행물은 아니라 해도 연간 두세 권 정도는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심지어 2020년에는 단 한 권도 내지 못했다. 오랫동안 새로운 호를 기다렸을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오큘로》 9호는 올해로 91세를 맞은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가 2018년에 발표한 영화 <이미지 북>에 대한 텍스트와 이미지 들로 꾸려졌다. 2019년 3월에 가상현실을 특집으로 한 8호(‘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를 발간한 이후,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 《오큘로》 편집부는 9호부터 잡지의 구성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판형도 바꾸어 앞으로는 매호를 하나의 주제나 한 명의 작가에 초점을 맞춘 단행본 형식으로 발간하기로 했다. 그리고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이후 국내 개봉 예정이던 <이미지 북>에 9호 전체 지면을 할애하기로 하고 준비에 나섰다. 이것이 대략 2019년 가을 무렵의 일이다. 몇몇 원고들이 지연되었던 사정도 있지만, 마침 개봉도 다소 늦춰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결국 9호 발간을 2020년 봄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이런 시기에 책을 내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몇 차례 발간을 미루었던 것이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 호의 제목으로 삼은 ‘열렬한 희망’이라는 표현은 <이미지 북>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다르의 내레이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고다르와의 인터뷰를 번역해 게재하고 <이미지 북>에서 발췌한 스틸 사진을 일부 수록한 것을 제외하면, 이번 호는 모두 국내 필자들이 집필한 글과 노재운 작가가 구성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 참여한 이들의 나이는 멀게는 서로 간에 대략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고다르가 국제적 예술영화의 ‘총아’로 받아들여졌던 시기(1960년대)가 지난 다음에 태어난 이들이라는 공통점은 있다. 게다가 고다르를 ‘현재’로서 경험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여전히 개봉되지 않고 있는 <이미지 북>의 사례에서 보듯) 여전히 쉽지 않은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바깥에서는 결코 읽힐 리 없는 언어로 글을 쓰는 이들이기도 하다. 즉, 세대적이고 개인적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고다르와 그의 영화에 끝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오큘로》 9호에서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고다르와 그의 영화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미지 북>이라는 그의 현재를 통해 가늠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 호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언어로 고다르 읽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보자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 북>의 후반부는 아랍과 관련된 사색으로 가득하다. 특히, 최근 미국의 철군 결정으로 다시 탈레반이 집권하게 된 (아랍 지역에 속한 나라는 아니나 지정학적으로 깊이 연루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부분도 있다. 이번 호 편집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카불 공항에서의 폭탄 테러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영화 <이미지 북>은 물론이고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이러한 사태 이전에 구성된 것이기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맥락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내용도 분명 있을 터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지 북>에 대한 책을 내기에 지금이 적기인지 아닌지를 다시 가늠해보기보다는 기왕의 결정으로 인한 책임을 감수하고자 한다. (유운성)
목차
003 유운성 … 책을 내면서
013 이도훈 … 도둑맞은 영화(들)의 역사
033 유운성 … 아르케이온의 도둑
057 신은실 … 중앙지역의 고현학
081 드미트리 골로트위크, 안토니나 데르지츠카야 … 개미 같은 말들: 고다르와의 대화
115 노재운 … 이미지 북
145 전효경 … 알레고리적 파편들
159 정경담, 함연선 … 암실에서 코끼리 만지기
책 속에서
P.18
“고다르에게 있어서 인용은 이미지를 구속하는 힘을 무효화시키고 이미지 자체를 무매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처럼 고다르는 인용을 통해 아카이브에서 수집하거나 훔쳐 온 개별 영화들이 그 자신을 고정시키는 서사, 의미, 상징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새로운 이야기와 발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도훈, ‘도둑맞은 영화(들)의 역사’, 《오큘로》 009호)
P.46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제도적인 측면에서 따라야 할 율법적 규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제도적으로 율법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노략질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여기저기서 ‘훔쳐온’ 온갖 이미지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미학적인 측면에서 근거를 제공해 주는 이론적 법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법이 미학적으로 이론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윤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정치적 표상으로 들끓는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온갖 정치적 슬로건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유운성, ‘아르케이온의 도둑’, 《오큘로》 009호)
P.69
“2019년 인터뷰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부가 노란 조끼 시위를 진압하는 프랑스 경찰력이 비대해졌다고 여기는지 묻자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폭탄을 반대하지 않지만 군대는 반대한다.” (…)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21세기에도 이집트·요르단·쿠웨이트 등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무장투쟁은 세속주의 민족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긴 에드워드 사이드와 여전히 교감한다.” (신은실, ‘중앙지역의 고현학’, 《오큘로》 009호)
P.151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적인 것이 마법사의 방이나 연금술사의 실험실들의 파편적인 것, 어지럽게 널려 있고 쌓여 있는 것에 대해 갖는 관계는 바로 바로크가 정통해 있던 것으로서 결코 우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썼다. 바로크적인 특성 자체가 <이미지 북>의 형식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특성과 맞붙어 있다는 사실이 고다르의 시선이 얼마나 알레고리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전효경, ‘알레고리적 파편들’, 《오큘로》 009호)
P.162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이미지 북>이 첫 공개된 이후 고다르가 응했던 인터뷰들을 보면 제목의 ‘이미지’가 복수가 아닌 단수라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잖아요.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자기가 만든 이미지들을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로 이해하라는 조언처럼 들려요. 조각보로 보지 말라는 거죠. 조각보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 군집을 만들기 위해서, 고다르는 새로운 이미지 처리 방법을 쓰는 것처럼 보여요.” (정경담, ‘암실에서 코끼리 만지기’, 《오큘로》 009호)
P.170
“고다르에게 있어 영화가 언어가 되기 위해선 단어만으로도 부족하지만, 언표만으로도 역시 부족합니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육체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고다르가 이 영화를 통해 도달코자 하는 곳은 영화의 육체(영화 이미지의 육체, 영화 사운드의 육체)가 발견되는 장소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 언어' 혹은 '영화 문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라고 추리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함연선, ‘암실에서 코끼리 만지기’, 《오큘로》 009호)
책을 내면서
《오큘로》 8호가 나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넘었다. 정기 간행물은 아니라 해도 연간 두세 권 정도는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심지어 2020년에는 단 한 권도 내지 못했다. 오랫동안 새로운 호를 기다렸을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오큘로》 9호는 올해로 91세를 맞은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가 2018년에 발표한 영화 <이미지 북>에 대한 텍스트와 이미지 들로 꾸려졌다. 2019년 3월에 가상현실을 특집으로 한 8호(‘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를 발간한 이후,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 《오큘로》 편집부는 9호부터 잡지의 구성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판형도 바꾸어 앞으로는 매호를 하나의 주제나 한 명의 작가에 초점을 맞춘 단행본 형식으로 발간하기로 했다. 그리고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이후 국내 개봉 예정이던 <이미지 북>에 9호 전체 지면을 할애하기로 하고 준비에 나섰다. 이것이 대략 2019년 가을 무렵의 일이다. 몇몇 원고들이 지연되었던 사정도 있지만, 마침 개봉도 다소 늦춰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결국 9호 발간을 2020년 봄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이런 시기에 책을 내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몇 차례 발간을 미루었던 것이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 호의 제목으로 삼은 ‘열렬한 희망’이라는 표현은 <이미지 북>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다르의 내레이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고다르와의 인터뷰를 번역해 게재하고 <이미지 북>에서 발췌한 스틸 사진을 일부 수록한 것을 제외하면, 이번 호는 모두 국내 필자들이 집필한 글과 노재운 작가가 구성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 참여한 이들의 나이는 멀게는 서로 간에 대략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고다르가 국제적 예술영화의 ‘총아’로 받아들여졌던 시기(1960년대)가 지난 다음에 태어난 이들이라는 공통점은 있다. 게다가 고다르를 ‘현재’로서 경험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여전히 개봉되지 않고 있는 <이미지 북>의 사례에서 보듯) 여전히 쉽지 않은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바깥에서는 결코 읽힐 리 없는 언어로 글을 쓰는 이들이기도 하다. 즉, 세대적이고 개인적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고다르와 그의 영화에 끝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오큘로》 9호에서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고다르와 그의 영화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미지 북>이라는 그의 현재를 통해 가늠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 호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언어로 고다르 읽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보자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 북>의 후반부는 아랍과 관련된 사색으로 가득하다. 특히, 최근 미국의 철군 결정으로 다시 탈레반이 집권하게 된 (아랍 지역에 속한 나라는 아니나 지정학적으로 깊이 연루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부분도 있다. 이번 호 편집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카불 공항에서의 폭탄 테러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영화 <이미지 북>은 물론이고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이러한 사태 이전에 구성된 것이기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맥락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내용도 분명 있을 터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지 북>에 대한 책을 내기에 지금이 적기인지 아닌지를 다시 가늠해보기보다는 기왕의 결정으로 인한 책임을 감수하고자 한다. (유운성)
목차
003 유운성 … 책을 내면서
013 이도훈 … 도둑맞은 영화(들)의 역사
033 유운성 … 아르케이온의 도둑
057 신은실 … 중앙지역의 고현학
081 드미트리 골로트위크, 안토니나 데르지츠카야 … 개미 같은 말들: 고다르와의 대화
115 노재운 … 이미지 북
145 전효경 … 알레고리적 파편들
159 정경담, 함연선 … 암실에서 코끼리 만지기
책 속에서
P.18
“고다르에게 있어서 인용은 이미지를 구속하는 힘을 무효화시키고 이미지 자체를 무매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처럼 고다르는 인용을 통해 아카이브에서 수집하거나 훔쳐 온 개별 영화들이 그 자신을 고정시키는 서사, 의미, 상징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새로운 이야기와 발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도훈, ‘도둑맞은 영화(들)의 역사’, 《오큘로》 009호)
P.46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제도적인 측면에서 따라야 할 율법적 규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제도적으로 율법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노략질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여기저기서 ‘훔쳐온’ 온갖 이미지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들의 법이란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 미학적인 측면에서 근거를 제공해 주는 이론적 법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법이 미학적으로 이론화되곤 할 때마다 고다르는 윤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맞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에 정치적 표상으로 들끓는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온갖 정치적 슬로건들이 만연하는 이유다.” (유운성, ‘아르케이온의 도둑’, 《오큘로》 009호)
P.69
“2019년 인터뷰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부가 노란 조끼 시위를 진압하는 프랑스 경찰력이 비대해졌다고 여기는지 묻자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폭탄을 반대하지 않지만 군대는 반대한다.” (…) <이미지 북>에서 고다르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21세기에도 이집트·요르단·쿠웨이트 등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무장투쟁은 세속주의 민족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긴 에드워드 사이드와 여전히 교감한다.” (신은실, ‘중앙지역의 고현학’, 《오큘로》 009호)
P.151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적인 것이 마법사의 방이나 연금술사의 실험실들의 파편적인 것, 어지럽게 널려 있고 쌓여 있는 것에 대해 갖는 관계는 바로 바로크가 정통해 있던 것으로서 결코 우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썼다. 바로크적인 특성 자체가 <이미지 북>의 형식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특성과 맞붙어 있다는 사실이 고다르의 시선이 얼마나 알레고리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전효경, ‘알레고리적 파편들’, 《오큘로》 009호)
P.162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이미지 북>이 첫 공개된 이후 고다르가 응했던 인터뷰들을 보면 제목의 ‘이미지’가 복수가 아닌 단수라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잖아요.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자기가 만든 이미지들을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로 이해하라는 조언처럼 들려요. 조각보로 보지 말라는 거죠. 조각보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 군집을 만들기 위해서, 고다르는 새로운 이미지 처리 방법을 쓰는 것처럼 보여요.” (정경담, ‘암실에서 코끼리 만지기’, 《오큘로》 009호)
P.170
“고다르에게 있어 영화가 언어가 되기 위해선 단어만으로도 부족하지만, 언표만으로도 역시 부족합니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육체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고다르가 이 영화를 통해 도달코자 하는 곳은 영화의 육체(영화 이미지의 육체, 영화 사운드의 육체)가 발견되는 장소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 언어' 혹은 '영화 문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라고 추리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함연선, ‘암실에서 코끼리 만지기’, 《오큘로》 0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