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클레어(지은이), 전혜은, 제이(옮긴이) 현실문화
336쪽 140*210mm ISBN:9788965642497
책소개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퀴어, 장애, 페미니즘, 환경, 계급을 넘나드는 교차성 정치의 교과서
장애인 퀴어 페미니스트가 써내려간 치열한 저항의 사유
소수자를 둘러싼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한편에서는 소수자 의제는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치부된다. 주류의 시선에서 다양한 소수자를 둘러싼 문제는 언제나 골칫거리 혹은 ‘나중’으로 미뤄져도 되는 것처럼 취급되거나 아예 비가시화되곤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자 운동의 이름으로 다른 소수자 정체성을 배척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최근 한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논쟁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단일한 쟁점에 갇혀 소수자 억압을 하나의 기제로만 파악하려 하며 연대를 거부하기도 한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은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 젠더, 계급, 인종, 장애 여부가 교차하는 지점을 복합적으로 파악하고 각기 다른 주제로 투쟁하는 운동 사이의 연대에 기초한 ‘교차성 정치’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연대와 제휴가 어떻게 가능하고 왜 반드시 필요한지를 다각도로 설득하며, 이 세상의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를 구축하는 것이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인지를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의 강점은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독특한 위치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노동계급 마을 출신의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 친족 성폭력 생존자,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 젠더퀴어 정체성을 지닌 소수자로서 살아왔다. 저자는 수많은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성찰한다. 이러한 다층성은 자연스레 단일 쟁점에 매몰되지 않는 시각을 열어주며, 연대를 통한 다중 쟁점 정치, 교차성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망명과 자긍심』은 1999년 초판이 발간된 이후 2009년과 2015년에 두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읽혀온 책이다. 영미권에서는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장애학, 퀴어학, 여성학, 젠더학 수업의 필독서로 쓰이고 있다. 또 「옮긴이 후기」에서는 ‘크립’, ‘프릭’, ‘트랜스’, ‘젠더퀴어’ 등 책에 등장하는 소수자 관련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다양한 운동 들 간 연대의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운동은 어떻게 서로 적대하게 되는가?
세상의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기 위하여
하나의 쟁점에만 몰두하는 정치는 때로 편협한 시각과 운동들 사이의 적대를 낳는다. 일라이 클레어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비장애 중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서로 협력하고 있는데, 이를 보지 않고 한 가지 억압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억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특정 쟁점에만 몰두하는 운동이 어떻게 적개심을 부추기고 다른 차별과 착취를 무시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탐욕적인 목재 회사에 의한 산림 파괴에 저항하는 환경운동가들은 때때로 벌목 노동자들을 “멍청한 짐승” 혹은 산림을 파괴하는 “목재 산업을 방조하는 충성스러운 짐승”(116쪽)처럼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벌목 노동자들 역시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자, 산림 파괴에 의해 줄어든 일자리로 생계의 위협을 받는 희생자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또 이는 무차별적인 자원 개발의 혜택을 누린 우리 모두가 공모자였다는 점을 지워버리고, 마치 벌목 노동자들에게 우리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양 떠넘기게 만들며, 벌목업 경영자들이 그러한 혐오 뒤에 숨게 돕는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화보에 등장한 하반신마비 장애인 엘런 스톨을 둘러싼 논쟁은 페미니즘과 장애 문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장애인을 무성적인 존재로 대하는 시각 사이의 간극들을 드러낸다. 저자는 엘런과 그를 지지하는 장애 활동가들을 비판했던 비장애인 페미니스트들에게 되묻는다. 장애인들이 “젠더도 없고 무성적인, 욕망할 만하지 않은 존재”(231쪽)로 취급받는 인식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있는지,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여성이 ‘중산층,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을 의미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계급, 인종, 성적 지향, 젠더, 장애가 엮인 그물망”을 보지 못하고, “트랜스섹슈얼리티와 트랜스젠더 경험을 무시하고 트랜스 여성을 비난하는”(232쪽) 시각을 드러내는 게 아닌지 묻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의 역사적 계보 그리기
‘프릭 쇼’에서 ‘의료화’로의 이행은 과연 진보인가?
일라이 클레어는 착취와 억압의 더 깊은 근원을 찾기 위해 역사적 탐구로 나아간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환경 파괴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해 미국 개척사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읽어내고, 오늘날 장애를 보는 편견의 시선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프릭 쇼’와 ‘의료화’의 과정을 따라간다.
미국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탐욕의 기원은 서부 정복 과정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유럽계 백인 미국인은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미국 북서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윤을 쫓아 모피, 농경지, 황금, 목재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세웠다. 이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한 이면에는 특정한 세계관, 즉 자원이 무한하다는 생각, 특정한 탐욕을 당연시하는 시각, 인종차별주의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일라이 클레어는 이런 세계관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이는 비단 미국뿐만이 아닌 자본주의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임시 처방이 아니라,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신념, 정책, 관행을 바꿔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때문에 삶의 기반이 흔들린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책임까지도 고려해야만 한다.
‘프릭 쇼’와 ‘의료화’의 역사는 장애에 대한 편견과 맹목이 역사적으로 구성되어온 과정을 보여주며, 오늘날 장애인을 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정말 ‘진보’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릭 쇼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 즉 장애인, 유색인, 혹은 외적으로 특이한 사람들을 돈을 받고 전시했던 것을 가리킨다. 일라이 클레어는 프릭 쇼가 비장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에 기반한 끔찍한 착취였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후에 이뤄진 것처럼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는 식의 ‘의료화’가 진보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흥행사와 프릭은 ‘시골뜨기’의 돈을 뜯어내기 위해 공모하기도 했으며, 당시 장애인에게 프릭 쇼는 ‘유일한’ 일자리이기도 했다. 반면 오늘날 장애를 분석하는 지배적인 모델인 의료적 모델은 장애를 병리적인 것으로 만들고, 동정과 비극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장애인을 자립이 불가능한 무능한 존재로 여겨, 그저 시설에 모아놓고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프릭 쇼’의 대안은 ‘의료화’가 될 수 없다. 일상적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는 것이다.
교차하는 정체성 위의 사유
자본주의적 억압에 둔감한 퀴어 운동을 비판하다
일라이 클레어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 시골의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자라났다. 어릴 적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성폭력 생존자이며,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 젠더퀴어로서 살아왔다. 저자는 이처럼 수많은 소수성이 교차하는 독특한 위치의 당사자로서, 흔히 소수자들 사이에서도 간과되곤 하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경계를 교차하고 넘어서는 사유를 펼쳐낸다.
그는 퀴어 운동이 지나치게 도시적인 정체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시골에서 자신을 숨기고 살던 퀴어가 도시로 나와 커밍아웃하고 햇살 아래 살아간다’는 전형적인 퀴어 해방 서사는 퀴어 인프라가 도시에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게 만들고, 시골은 퀴어 혐오의 공간으로 낙인찍어버린다. 이는 시골 노동계급의 가난한 퀴어들이 고립되게 만들고, 좀 더 넓은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퀴어 운동이 자본주의적 억압에 대해 둔감하지 않은지, 심지어 그것에 동조하고 편입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도 묻는다. 일라이 클레어는 1969년 뉴욕 맨해튼에서 벌어진 기념비적인 성소수자 투쟁인 ‘스톤월 항쟁’ 25주년 행사가 원래의 저항성을 잃은 자본주의적 “호화 쇼”(104쪽)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특정한 퀴어 운동이 중산층과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왜 그런 햇사에서 창출되는 돈이 가난한 노동계급 퀴어에게는 돌아가지 않는지를 묻는다.
혐오와 동정을 넘어
‘집으로서의 몸’을 되찾기 위하여
퀴어 정체성과 페미니즘, 계급과 환경을 오가는 일라이 클레어의 급진적 사유가 시작되는 곳은 다름 아닌 ‘몸’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차별과 억압 속에서 “집으로서의 몸”(57~61쪽)을 박탈당하고 도둑맞았다는 “망명”의 감각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정체성에 대한 오랜 탐구 끝에 자신이 자리 잡은 퀴어 공동체 역시 오롯이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며, 심지어 성적 학대의 공간이자 퀴어에 대한 억압의 공간인 시골 역시 “집으로서의 몸”의 일부라고 고백한다.
수많은 소수성이 교차하는 몸에 대한 사유는, 결코 하나의 소수성의 해방만으로는 집과 우리 몸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248쪽)
해방이란 곧 특정한 억압이 아닌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일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 없이 동성결혼을 통해 주류에 편입되는 것을 퀴어 해방이라고 할 수 없다.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없는 환경운동은 “치명적인 상처에 반창고만 붙여놓는”(139쪽) 임시 처방이 돼버린다. 장애인을 무성화하고 아이 취급하는 시선에 대한 성찰 없이는 여성 대상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따라서 결국 우리의 몸을 되찾는 일, 내면화된 억압에 맞서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196쪽) 근본적인 저항은 다양한 운동 간의 연대에 기반한 교차성 정치를 통해서 가능하다. 『망명과 자긍심』은 우리에게 그 해방의 시작을 위한 “무모하고 대담한 이야기”(279쪽)를 우리에게 건넨다.
책소개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퀴어, 장애, 페미니즘, 환경, 계급을 넘나드는 교차성 정치의 교과서
장애인 퀴어 페미니스트가 써내려간 치열한 저항의 사유
소수자를 둘러싼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한편에서는 소수자 의제는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치부된다. 주류의 시선에서 다양한 소수자를 둘러싼 문제는 언제나 골칫거리 혹은 ‘나중’으로 미뤄져도 되는 것처럼 취급되거나 아예 비가시화되곤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자 운동의 이름으로 다른 소수자 정체성을 배척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최근 한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논쟁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단일한 쟁점에 갇혀 소수자 억압을 하나의 기제로만 파악하려 하며 연대를 거부하기도 한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은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 젠더, 계급, 인종, 장애 여부가 교차하는 지점을 복합적으로 파악하고 각기 다른 주제로 투쟁하는 운동 사이의 연대에 기초한 ‘교차성 정치’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연대와 제휴가 어떻게 가능하고 왜 반드시 필요한지를 다각도로 설득하며, 이 세상의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를 구축하는 것이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인지를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의 강점은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독특한 위치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노동계급 마을 출신의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 친족 성폭력 생존자,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 젠더퀴어 정체성을 지닌 소수자로서 살아왔다. 저자는 수많은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성찰한다. 이러한 다층성은 자연스레 단일 쟁점에 매몰되지 않는 시각을 열어주며, 연대를 통한 다중 쟁점 정치, 교차성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망명과 자긍심』은 1999년 초판이 발간된 이후 2009년과 2015년에 두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읽혀온 책이다. 영미권에서는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장애학, 퀴어학, 여성학, 젠더학 수업의 필독서로 쓰이고 있다. 또 「옮긴이 후기」에서는 ‘크립’, ‘프릭’, ‘트랜스’, ‘젠더퀴어’ 등 책에 등장하는 소수자 관련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다양한 운동 들 간 연대의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운동은 어떻게 서로 적대하게 되는가?
세상의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기 위하여
하나의 쟁점에만 몰두하는 정치는 때로 편협한 시각과 운동들 사이의 적대를 낳는다. 일라이 클레어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비장애 중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서로 협력하고 있는데, 이를 보지 않고 한 가지 억압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억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특정 쟁점에만 몰두하는 운동이 어떻게 적개심을 부추기고 다른 차별과 착취를 무시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탐욕적인 목재 회사에 의한 산림 파괴에 저항하는 환경운동가들은 때때로 벌목 노동자들을 “멍청한 짐승” 혹은 산림을 파괴하는 “목재 산업을 방조하는 충성스러운 짐승”(116쪽)처럼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벌목 노동자들 역시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자, 산림 파괴에 의해 줄어든 일자리로 생계의 위협을 받는 희생자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또 이는 무차별적인 자원 개발의 혜택을 누린 우리 모두가 공모자였다는 점을 지워버리고, 마치 벌목 노동자들에게 우리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양 떠넘기게 만들며, 벌목업 경영자들이 그러한 혐오 뒤에 숨게 돕는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화보에 등장한 하반신마비 장애인 엘런 스톨을 둘러싼 논쟁은 페미니즘과 장애 문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장애인을 무성적인 존재로 대하는 시각 사이의 간극들을 드러낸다. 저자는 엘런과 그를 지지하는 장애 활동가들을 비판했던 비장애인 페미니스트들에게 되묻는다. 장애인들이 “젠더도 없고 무성적인, 욕망할 만하지 않은 존재”(231쪽)로 취급받는 인식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있는지,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여성이 ‘중산층,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을 의미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계급, 인종, 성적 지향, 젠더, 장애가 엮인 그물망”을 보지 못하고, “트랜스섹슈얼리티와 트랜스젠더 경험을 무시하고 트랜스 여성을 비난하는”(232쪽) 시각을 드러내는 게 아닌지 묻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의 역사적 계보 그리기
‘프릭 쇼’에서 ‘의료화’로의 이행은 과연 진보인가?
일라이 클레어는 착취와 억압의 더 깊은 근원을 찾기 위해 역사적 탐구로 나아간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환경 파괴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해 미국 개척사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읽어내고, 오늘날 장애를 보는 편견의 시선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프릭 쇼’와 ‘의료화’의 과정을 따라간다.
미국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탐욕의 기원은 서부 정복 과정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유럽계 백인 미국인은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미국 북서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윤을 쫓아 모피, 농경지, 황금, 목재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세웠다. 이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한 이면에는 특정한 세계관, 즉 자원이 무한하다는 생각, 특정한 탐욕을 당연시하는 시각, 인종차별주의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일라이 클레어는 이런 세계관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이는 비단 미국뿐만이 아닌 자본주의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임시 처방이 아니라,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신념, 정책, 관행을 바꿔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때문에 삶의 기반이 흔들린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책임까지도 고려해야만 한다.
‘프릭 쇼’와 ‘의료화’의 역사는 장애에 대한 편견과 맹목이 역사적으로 구성되어온 과정을 보여주며, 오늘날 장애인을 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정말 ‘진보’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릭 쇼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 즉 장애인, 유색인, 혹은 외적으로 특이한 사람들을 돈을 받고 전시했던 것을 가리킨다. 일라이 클레어는 프릭 쇼가 비장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에 기반한 끔찍한 착취였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후에 이뤄진 것처럼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는 식의 ‘의료화’가 진보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흥행사와 프릭은 ‘시골뜨기’의 돈을 뜯어내기 위해 공모하기도 했으며, 당시 장애인에게 프릭 쇼는 ‘유일한’ 일자리이기도 했다. 반면 오늘날 장애를 분석하는 지배적인 모델인 의료적 모델은 장애를 병리적인 것으로 만들고, 동정과 비극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장애인을 자립이 불가능한 무능한 존재로 여겨, 그저 시설에 모아놓고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프릭 쇼’의 대안은 ‘의료화’가 될 수 없다. 일상적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는 것이다.
교차하는 정체성 위의 사유
자본주의적 억압에 둔감한 퀴어 운동을 비판하다
일라이 클레어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 시골의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자라났다. 어릴 적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성폭력 생존자이며,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 젠더퀴어로서 살아왔다. 저자는 이처럼 수많은 소수성이 교차하는 독특한 위치의 당사자로서, 흔히 소수자들 사이에서도 간과되곤 하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경계를 교차하고 넘어서는 사유를 펼쳐낸다.
그는 퀴어 운동이 지나치게 도시적인 정체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시골에서 자신을 숨기고 살던 퀴어가 도시로 나와 커밍아웃하고 햇살 아래 살아간다’는 전형적인 퀴어 해방 서사는 퀴어 인프라가 도시에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게 만들고, 시골은 퀴어 혐오의 공간으로 낙인찍어버린다. 이는 시골 노동계급의 가난한 퀴어들이 고립되게 만들고, 좀 더 넓은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퀴어 운동이 자본주의적 억압에 대해 둔감하지 않은지, 심지어 그것에 동조하고 편입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도 묻는다. 일라이 클레어는 1969년 뉴욕 맨해튼에서 벌어진 기념비적인 성소수자 투쟁인 ‘스톤월 항쟁’ 25주년 행사가 원래의 저항성을 잃은 자본주의적 “호화 쇼”(104쪽)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특정한 퀴어 운동이 중산층과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왜 그런 햇사에서 창출되는 돈이 가난한 노동계급 퀴어에게는 돌아가지 않는지를 묻는다.
혐오와 동정을 넘어
‘집으로서의 몸’을 되찾기 위하여
퀴어 정체성과 페미니즘, 계급과 환경을 오가는 일라이 클레어의 급진적 사유가 시작되는 곳은 다름 아닌 ‘몸’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차별과 억압 속에서 “집으로서의 몸”(57~61쪽)을 박탈당하고 도둑맞았다는 “망명”의 감각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정체성에 대한 오랜 탐구 끝에 자신이 자리 잡은 퀴어 공동체 역시 오롯이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며, 심지어 성적 학대의 공간이자 퀴어에 대한 억압의 공간인 시골 역시 “집으로서의 몸”의 일부라고 고백한다.
수많은 소수성이 교차하는 몸에 대한 사유는, 결코 하나의 소수성의 해방만으로는 집과 우리 몸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248쪽)
해방이란 곧 특정한 억압이 아닌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일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 없이 동성결혼을 통해 주류에 편입되는 것을 퀴어 해방이라고 할 수 없다.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 없는 환경운동은 “치명적인 상처에 반창고만 붙여놓는”(139쪽) 임시 처방이 돼버린다. 장애인을 무성화하고 아이 취급하는 시선에 대한 성찰 없이는 여성 대상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따라서 결국 우리의 몸을 되찾는 일, 내면화된 억압에 맞서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196쪽) 근본적인 저항은 다양한 운동 간의 연대에 기반한 교차성 정치를 통해서 가능하다. 『망명과 자긍심』은 우리에게 그 해방의 시작을 위한 “무모하고 대담한 이야기”(279쪽)를 우리에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