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미술과 여성 작가
1992년부터 2018년까지 30여년 동안 전시기획자와 비평가로 활동해 온 백지숙의 비평선집이 출간되었다. 백지숙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아뜰리에 에르메스, 아르코미술관, 인사미술공간 등 미술계의 다양한 장소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해온 전시기획자이자 비평가이다.
이 책은 수많은 현대미술의 이슈 가운데에서도 특히 여성 작가와 작품을 비중 있게 다룬다. 윤석남부터 박소영, 장영혜, 최소연, 정정엽, 김명희, 김주영, 양주혜, 김옥선, 고산금, 류준화, 김정욱, 주황, 나타샤 니직, 정재연, 곽이브, 송상희, 양혜규, 홍승혜까지 여성작가 및 작업에 대해 미학적 관점과 비평적 시각이 담긴 글 스무 여 편이 포함된다. 백지숙은 여성미술을 이 책의 중요한 테마로 선택한 이유를 “일을 시작할 때부터 페미니즘은 민중미술과 더불어 활동의 주축이었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충분히 개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최소한 표면적으로 이 책은 훨씬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3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그럴 수도 있지만 민중미술과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지리정치적인 이슈나 공동체, 도시, 북한 미술, 기관 비평, 아카이브, 뉴미디어 아트 등 당대의 이슈들이 필자의 고유한 시각 안에서 논의된다. 서동진은 백지숙의 문화 평론 방식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에서의 문화 평론이란 문화적 콘텐츠나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도래한 역사적 시대에서 문화와 예술이 처한 위치를 식별하고 정의하며 그것이 함유한 정치적 사회적 효과를 가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홍희는 이를 “백지숙은 역사와 사회를 예술의 배경이 아니라 전경으로 간주하고 작품을 역사적 문화적 과정으로 파악하며 예술의 의미를 역사, 사회, 문화와의 유기적 만남과 필연적 관계에서 발견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백지숙은 역사와 사회라는 거대한 두 개의 축을 시의성과 자신의 관점 안에서 배치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며 글을 써왔고 그러한 관점은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다양화, 복수화시킨다.
큐레이터와 글쓰기
글쓰기란 큐레이터에게 전시 자체와 함께 전시를 관객에게 설명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백지숙은 큐레이팅과 글쓰기를 “가르고 구획하기보다는 늘리고 연결하기 또는 빼어난 전문가주의보다는 협업적 공을 들여야 하는 문화 작업임을 미리 알려 준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언급은 백지숙의 큐레토리얼적 실천에서 글쓰기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비평가로서 백지숙은 전시와 별개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왔다. “작가와 더불어 작품 자체가 당대 문화 속에서 산출하고 투입한 특별한 지식의 형태를 일시적 장소에서 공유하려는, 이른바 큐레이팅의 비평적 관점이 작가론에도 반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필자에게 비평과 큐레이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비평적 관점을 지지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글쓰기라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다.
『본 것을 걸어가듯이: 어느 큐레이터의 글쓰기』는 전시기획자와 비평가로서 30여년간 활동해온 필자의 경험이 집약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경험들을 현대미술을 경유해서 풀어낸 글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장의 언어로 쓰여진 한국 현대미술사 책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목차
[서동진] 이행완료: 비판적 미술과 역사적 비평의 어느 종생기
도시·대중·문화
공과 사 그리고 예술가
설거지와 노스탤지어
윤석남 – 건망증 또는 악몽을 건너는 이야기
박소영의 도상윤리학 – 이분법으로 세계를 껴안기
집 속의 미디어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을 복습하다
장영혜의 뜻은 예술을 맛보는 것이다
선샤인 – 남북을 비추는 세 가지 시선
최소연 – 이 스펙터클 세상에서 물수제비 뜨기
뉴미디어 아트 전시 기획을 위한 몇 개의 조건
정정엽 – 낯선 생명, 그 생명의 두께
도시의 기억, 공간의 역사
김명희 – 그림을 낳아 기르다
공원 쉼표 사람들
한국의 비판적 미술, 그 몇몇 지류
새로운 과거
김주영의 노마디즘
2005년의 민중미술 또는 민중미술의 2005년
양주혜의 《길 끝의 길》
지역 미술과 국제 미술 사이—정치적 미술의 몇 가지 의미들
‘아시아’를 횡단하는 기억술과 항해술에 대하여
김옥선의 사진 – 인류학적 보고
액티베이팅 ‘액티베이팅 코리아’
고산금 – 구슬비 또는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류준화 – 소녀는 무섭다?!
미술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미술의 기억 충동
김정욱의 잔혹동화 이후
주황 –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반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타샤 니직 – <안드레아>, 이 트라이앵글의 세계에서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퍼블릭 스토리》
정재연의 제안, 과격하거나 겸손한
부재와 결핍을 프로그래밍하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곽이브의 윈도 – 평평한 것은 멀리까지 간다
송상희 – ‘역사의 피부’를 어루만지다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지 않는가—〈한 개 열린 구멍〉을 통해 보기
양혜규 – 프롬 코리아 위드 러브(From Korea with Love)
홍승혜의 사각 광장
[김홍희] 백지숙의 여성 작가 비평 글에 부쳐
후기: 일과 글을 한 데 묶으며
저자 소개
백지숙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와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퍼블릭 스토리》(2013~14) 예술감독이었으며, 아뜰리에 에르메스 예술감독(2011~1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관장과 인사미술공간의 프로젝트 디렉터를 역임했다(2005~08).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와 마로니에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를 지냈다. 2007년 뉴질랜드 고벳 브루스터 미술관의 《액티베이팅 코리아(Activating Korea: Tides of Collective Action)》, 2006년 광주비엔날레의 《마지막 장-길을 찾아서: 세계 도시 다시 그리다》, 2005년 독일 쿤스트할레 다름슈타트의 《시각의 전쟁(The Battle of Visions)》을 공동 기획했다. 2002년에는 대안공간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도시의 기억, 공간의 역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일터•가정, 남성•여성, 생산•소비, 공•사라는 이항 대립 계열의 목록이 구체적이며 대중적인 이미지로 각인되고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균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 소비, 사적 영역의 항목을 묶어 주는 가정의 완고한 울타리 곳곳에 이미 금이 가고 있음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 주는 매체가 바로 이 시기 여성 잡지다. (…) 가령 행복한 자만심에 가득한 모자상을 표지에 담아 현대의 현모양처론을 특집으로 내놓으면서도 “모든 생활 가치는 가족 중심의 의존성에서 벗어나 국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재인식되어야 한다”라며 조국의 현대화에 앞장 서자 거나 “통일 번영을 위한 국민 총화를 과시하자”라는 칼럼을 싣고 있다. 진주 목걸이를 걸고 한 마리에 20만 원 한다는 애견을 껴안은 주부 사진이 있는가 하면, 여공의 가혹한 착취 상황과 매매춘 문제를 고발하거나 농촌의 지식 여성상과 농촌 여성은 변하고 있다는 르포를 싣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력적인 상품의 스펙터클과 소비에 관한 온갖 매뉴얼과 나란히 알뜰 가계부 쓰기를 권장하거나 부업을 소개하는 난이 어김없이 끼어들기도 한다. ‘국가 가부장’의 주도 아래 경제 개발과 수출 드라이브가 진행된 1970년대 한국은 가정성의 내부 구조에 노골적인 사회 의제, 다양한 노동 형태, 계급 격차 등 자기 모순적인 내용이 틈입할 수밖에 없었다.” (76쪽)
“모더니티의 역동적이고 격렬한 실험장이었던 도시에서 밀려나 시간이 고여 있는 가정에 붙박였던 여성 작가들이 실제로 바란 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혼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 아니었을까? 발터 벤야민은 한가롭게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며 특유의 관음적 시선으로 사회적 사건과 공공 장소를 탐색하곤 했던 만보객을 현대적 예술가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이때 벤야민의 소요자에게 부여된 성은 남성이다. 반면 모더니티의 도시를 여유 있게 걸어 다니는 여성 작가들은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시선의 과녁이다. 도시의 대중문화를 탐색하려는 여성들은 신체의 주인이기는커녕 범죄의 표적이 된다. 심지어 네온의 밤거리를 지나가는 여성들은 관음증을 넘어선 노출증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술가가 되려면 여성이기를 포기하거나, 여성이 되려면 예술가의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 이유다.” (81쪽)
“소설이야말로 공간적 실천의 여행담이라고 일반화해도 큰 무리가 없다. 한국 근현대 소설에서는 귀향담이라든가 여로담이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아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가장 발전한 이야기 형태로서의 소설은 오늘날 위기에 빠져 있다. 소설가이자 미술사가인 존 버거는 근대소설의 위기로 야기된 이야기 방식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에 따라 잇달아 전개되는 연속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거의 할 수 없어졌다. 우리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줄거리를 가로지르는 어떤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적인 내레이션이 불가능해진 상황, 그래서 일련의 사건을 줄거리상의 인과적인 점들로 보기 어렵고, 도리어 하나의 사건이야말로 여러 이야기 줄거리가 교차하는 중심점으로밖에 볼 수 없는 오늘날의 서사적 상황을 지적하는 말이다.” (183쪽)
“새로운 과거는 좀 더 직접적으로 20세기라는 가까운 과거를 기억해 내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때의 20세기는 국가와 민족 혹은 종교와 인종이라는 거대 담론이 지배한 시기로서, 직설적인 동시에 비유적인 의미에서 혁명의 시대라 칭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과거는 오래된 미래의 상대 짝으로 끊임없는 호출과 재구성과 해체의 과정 속에서만 살아 생동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예술은 미래보다 과거를 반추하는 강력한 무기로 등장하며, 새로운 과거는 개별 주체의 기억 행위와 나란히 형성된다. 기억 행위로서의 예술은 문화 텍스트로 이루어진 기존의 기억 공간에 자신을 등록하고, 또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기억 공간을 만들어 낸다.” (204쪽)
“아시아 청년이 실시간 이동과 접속으로 주도하는 열풍 현상과 달리 성숙한 아시아 국가들이 탐색하는 성찰의 공간은 주로 기억술과 항해술에 의존한다. 망각한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억 간 투쟁 그리고 도시 간 연계망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참조하는 항해의 오래된 체험은, 몇 가지 정식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여러 아시아의 지역적 역사 및 도시 구조와 시민의 취향이 지닌 면면을 드러낸다. 우선 기억술은 그간 도시의 구조와 동시성을 강조하는 현대 도시 연구에서 배제되어 온 가까운 과거의 역사를 향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 (…)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항해술은 인터넷 내비게이션이 대체한다. 유비쿼터스 미디어의 대세 속에서 물리적 시공간의 이동과 변별력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결과 물자와 인력의 이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전적인 항해술을 차용하는 항해 체험은 이렇게 없어져 버린 이동 경로를 가시화함으로써 경제적 범주를 또렷이 각인시키고, 이 항로를 통해 장소성을 복원하며 구체적인 네트워킹 지점들을 탐색한다. 그러므로 항해의 기술은 민족 국가 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단절된 연대의 시야를 넓히자는 작전과도 연관된다.” (291쪽)
여성 미술과 여성 작가
1992년부터 2018년까지 30여년 동안 전시기획자와 비평가로 활동해 온 백지숙의 비평선집이 출간되었다. 백지숙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아뜰리에 에르메스, 아르코미술관, 인사미술공간 등 미술계의 다양한 장소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해온 전시기획자이자 비평가이다.
이 책은 수많은 현대미술의 이슈 가운데에서도 특히 여성 작가와 작품을 비중 있게 다룬다. 윤석남부터 박소영, 장영혜, 최소연, 정정엽, 김명희, 김주영, 양주혜, 김옥선, 고산금, 류준화, 김정욱, 주황, 나타샤 니직, 정재연, 곽이브, 송상희, 양혜규, 홍승혜까지 여성작가 및 작업에 대해 미학적 관점과 비평적 시각이 담긴 글 스무 여 편이 포함된다. 백지숙은 여성미술을 이 책의 중요한 테마로 선택한 이유를 “일을 시작할 때부터 페미니즘은 민중미술과 더불어 활동의 주축이었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충분히 개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최소한 표면적으로 이 책은 훨씬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3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그럴 수도 있지만 민중미술과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지리정치적인 이슈나 공동체, 도시, 북한 미술, 기관 비평, 아카이브, 뉴미디어 아트 등 당대의 이슈들이 필자의 고유한 시각 안에서 논의된다. 서동진은 백지숙의 문화 평론 방식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에서의 문화 평론이란 문화적 콘텐츠나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도래한 역사적 시대에서 문화와 예술이 처한 위치를 식별하고 정의하며 그것이 함유한 정치적 사회적 효과를 가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홍희는 이를 “백지숙은 역사와 사회를 예술의 배경이 아니라 전경으로 간주하고 작품을 역사적 문화적 과정으로 파악하며 예술의 의미를 역사, 사회, 문화와의 유기적 만남과 필연적 관계에서 발견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백지숙은 역사와 사회라는 거대한 두 개의 축을 시의성과 자신의 관점 안에서 배치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며 글을 써왔고 그러한 관점은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다양화, 복수화시킨다.
큐레이터와 글쓰기
글쓰기란 큐레이터에게 전시 자체와 함께 전시를 관객에게 설명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백지숙은 큐레이팅과 글쓰기를 “가르고 구획하기보다는 늘리고 연결하기 또는 빼어난 전문가주의보다는 협업적 공을 들여야 하는 문화 작업임을 미리 알려 준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언급은 백지숙의 큐레토리얼적 실천에서 글쓰기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비평가로서 백지숙은 전시와 별개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왔다. “작가와 더불어 작품 자체가 당대 문화 속에서 산출하고 투입한 특별한 지식의 형태를 일시적 장소에서 공유하려는, 이른바 큐레이팅의 비평적 관점이 작가론에도 반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필자에게 비평과 큐레이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비평적 관점을 지지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글쓰기라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다.
『본 것을 걸어가듯이: 어느 큐레이터의 글쓰기』는 전시기획자와 비평가로서 30여년간 활동해온 필자의 경험이 집약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경험들을 현대미술을 경유해서 풀어낸 글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장의 언어로 쓰여진 한국 현대미술사 책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목차
[서동진] 이행완료: 비판적 미술과 역사적 비평의 어느 종생기
도시·대중·문화
공과 사 그리고 예술가
설거지와 노스탤지어
윤석남 – 건망증 또는 악몽을 건너는 이야기
박소영의 도상윤리학 – 이분법으로 세계를 껴안기
집 속의 미디어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을 복습하다
장영혜의 뜻은 예술을 맛보는 것이다
선샤인 – 남북을 비추는 세 가지 시선
최소연 – 이 스펙터클 세상에서 물수제비 뜨기
뉴미디어 아트 전시 기획을 위한 몇 개의 조건
정정엽 – 낯선 생명, 그 생명의 두께
도시의 기억, 공간의 역사
김명희 – 그림을 낳아 기르다
공원 쉼표 사람들
한국의 비판적 미술, 그 몇몇 지류
새로운 과거
김주영의 노마디즘
2005년의 민중미술 또는 민중미술의 2005년
양주혜의 《길 끝의 길》
지역 미술과 국제 미술 사이—정치적 미술의 몇 가지 의미들
‘아시아’를 횡단하는 기억술과 항해술에 대하여
김옥선의 사진 – 인류학적 보고
액티베이팅 ‘액티베이팅 코리아’
고산금 – 구슬비 또는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류준화 – 소녀는 무섭다?!
미술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미술의 기억 충동
김정욱의 잔혹동화 이후
주황 –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반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타샤 니직 – <안드레아>, 이 트라이앵글의 세계에서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퍼블릭 스토리》
정재연의 제안, 과격하거나 겸손한
부재와 결핍을 프로그래밍하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곽이브의 윈도 – 평평한 것은 멀리까지 간다
송상희 – ‘역사의 피부’를 어루만지다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지 않는가—〈한 개 열린 구멍〉을 통해 보기
양혜규 – 프롬 코리아 위드 러브(From Korea with Love)
홍승혜의 사각 광장
[김홍희] 백지숙의 여성 작가 비평 글에 부쳐
후기: 일과 글을 한 데 묶으며
저자 소개
백지숙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와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퍼블릭 스토리》(2013~14) 예술감독이었으며, 아뜰리에 에르메스 예술감독(2011~1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관장과 인사미술공간의 프로젝트 디렉터를 역임했다(2005~08).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와 마로니에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를 지냈다. 2007년 뉴질랜드 고벳 브루스터 미술관의 《액티베이팅 코리아(Activating Korea: Tides of Collective Action)》, 2006년 광주비엔날레의 《마지막 장-길을 찾아서: 세계 도시 다시 그리다》, 2005년 독일 쿤스트할레 다름슈타트의 《시각의 전쟁(The Battle of Visions)》을 공동 기획했다. 2002년에는 대안공간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도시의 기억, 공간의 역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일터•가정, 남성•여성, 생산•소비, 공•사라는 이항 대립 계열의 목록이 구체적이며 대중적인 이미지로 각인되고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균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 소비, 사적 영역의 항목을 묶어 주는 가정의 완고한 울타리 곳곳에 이미 금이 가고 있음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 주는 매체가 바로 이 시기 여성 잡지다. (…) 가령 행복한 자만심에 가득한 모자상을 표지에 담아 현대의 현모양처론을 특집으로 내놓으면서도 “모든 생활 가치는 가족 중심의 의존성에서 벗어나 국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재인식되어야 한다”라며 조국의 현대화에 앞장 서자 거나 “통일 번영을 위한 국민 총화를 과시하자”라는 칼럼을 싣고 있다. 진주 목걸이를 걸고 한 마리에 20만 원 한다는 애견을 껴안은 주부 사진이 있는가 하면, 여공의 가혹한 착취 상황과 매매춘 문제를 고발하거나 농촌의 지식 여성상과 농촌 여성은 변하고 있다는 르포를 싣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력적인 상품의 스펙터클과 소비에 관한 온갖 매뉴얼과 나란히 알뜰 가계부 쓰기를 권장하거나 부업을 소개하는 난이 어김없이 끼어들기도 한다. ‘국가 가부장’의 주도 아래 경제 개발과 수출 드라이브가 진행된 1970년대 한국은 가정성의 내부 구조에 노골적인 사회 의제, 다양한 노동 형태, 계급 격차 등 자기 모순적인 내용이 틈입할 수밖에 없었다.” (76쪽)
“모더니티의 역동적이고 격렬한 실험장이었던 도시에서 밀려나 시간이 고여 있는 가정에 붙박였던 여성 작가들이 실제로 바란 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혼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 아니었을까? 발터 벤야민은 한가롭게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며 특유의 관음적 시선으로 사회적 사건과 공공 장소를 탐색하곤 했던 만보객을 현대적 예술가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이때 벤야민의 소요자에게 부여된 성은 남성이다. 반면 모더니티의 도시를 여유 있게 걸어 다니는 여성 작가들은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시선의 과녁이다. 도시의 대중문화를 탐색하려는 여성들은 신체의 주인이기는커녕 범죄의 표적이 된다. 심지어 네온의 밤거리를 지나가는 여성들은 관음증을 넘어선 노출증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술가가 되려면 여성이기를 포기하거나, 여성이 되려면 예술가의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 이유다.” (81쪽)
“소설이야말로 공간적 실천의 여행담이라고 일반화해도 큰 무리가 없다. 한국 근현대 소설에서는 귀향담이라든가 여로담이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아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가장 발전한 이야기 형태로서의 소설은 오늘날 위기에 빠져 있다. 소설가이자 미술사가인 존 버거는 근대소설의 위기로 야기된 이야기 방식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에 따라 잇달아 전개되는 연속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거의 할 수 없어졌다. 우리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줄거리를 가로지르는 어떤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적인 내레이션이 불가능해진 상황, 그래서 일련의 사건을 줄거리상의 인과적인 점들로 보기 어렵고, 도리어 하나의 사건이야말로 여러 이야기 줄거리가 교차하는 중심점으로밖에 볼 수 없는 오늘날의 서사적 상황을 지적하는 말이다.” (183쪽)
“새로운 과거는 좀 더 직접적으로 20세기라는 가까운 과거를 기억해 내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때의 20세기는 국가와 민족 혹은 종교와 인종이라는 거대 담론이 지배한 시기로서, 직설적인 동시에 비유적인 의미에서 혁명의 시대라 칭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과거는 오래된 미래의 상대 짝으로 끊임없는 호출과 재구성과 해체의 과정 속에서만 살아 생동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예술은 미래보다 과거를 반추하는 강력한 무기로 등장하며, 새로운 과거는 개별 주체의 기억 행위와 나란히 형성된다. 기억 행위로서의 예술은 문화 텍스트로 이루어진 기존의 기억 공간에 자신을 등록하고, 또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기억 공간을 만들어 낸다.” (204쪽)
“아시아 청년이 실시간 이동과 접속으로 주도하는 열풍 현상과 달리 성숙한 아시아 국가들이 탐색하는 성찰의 공간은 주로 기억술과 항해술에 의존한다. 망각한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억 간 투쟁 그리고 도시 간 연계망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참조하는 항해의 오래된 체험은, 몇 가지 정식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여러 아시아의 지역적 역사 및 도시 구조와 시민의 취향이 지닌 면면을 드러낸다. 우선 기억술은 그간 도시의 구조와 동시성을 강조하는 현대 도시 연구에서 배제되어 온 가까운 과거의 역사를 향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 (…)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항해술은 인터넷 내비게이션이 대체한다. 유비쿼터스 미디어의 대세 속에서 물리적 시공간의 이동과 변별력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결과 물자와 인력의 이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전적인 항해술을 차용하는 항해 체험은 이렇게 없어져 버린 이동 경로를 가시화함으로써 경제적 범주를 또렷이 각인시키고, 이 항로를 통해 장소성을 복원하며 구체적인 네트워킹 지점들을 탐색한다. 그러므로 항해의 기술은 민족 국가 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단절된 연대의 시야를 넓히자는 작전과도 연관된다.” (2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