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지영 지음 / ISBN 979-11-965545-8-3 / 김영삼 디자인 / 반양장 / 336쪽 / 180x111mm
책소개
이 책은 큐레이터 맹지영이 2021년 2월 22일부터 3월 27일까지 30일동안 다섯 작가(샌정, 이재헌, 임충섭, 정경빈, 최상아)의 작품 1점당 20시간씩(1일 4시간) 총 720시간을 관람하면서 변화하는 생각을 글로 담고, 그 관람의 시간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송출했던 프로젝트의 기록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웨스 WESS는 기획자 11명이 공동으로 운영하며 각자 주어진 기간에 자신의 기획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의 공동운영자 중 한 명인 저자는 2021년 2-3월 5주에 걸쳐 《one at a time》을 기획했다. 이 기간동안 전시 공간은 저자만을 위한 감상의 공간으로 바뀌었고, 다섯 작가의 각 작품은 온전한 감상을 위해 한 주에 하나씩 볼 수 있도록 했다. 저자가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관람객’들은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서 작품이 아닌 그가 감상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큐레이터이자 감상자로서 작품과의 오롯한 만남을 보장받으며 작품을 이해하는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저자의 실험인 동시에 작품을 보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온전한 관람을 갈망하는 큐레이터 맹지영의 시도가 어떻게 변해가고 어디로 도달하게 되는지 그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감상의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목차
들어가며
첫 번째주, 샌정
두 번째주, 최상아
세 번째주, 이재헌
네 번째주, 임충섭
다섯 번째주, 정경빈
관객의 시간
작가의 말
나가며
저자소개
맹지영은 서울과 미국에서 미술과 관련한 공부와 실무를 경험하고, 2009년부터 2020년 4월까지 비영리기관인 두산아트센터의 두산갤러리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두산갤러리의 전시(서울/뉴욕), 교육 프로그램(두산 큐레이터 워크샵, 두산아트스쿨 외)을 기획, 운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의 기관에 신진 및 중진 전시작가의 작가론과 다양한 미술매체에 리뷰 등을 다수 집필했고, 저서로 『스몰토크: 뉴욕에서의 대화』(2015)가 있다. 현재 시각예술분야에서 현장연구와 기획, 그리고 글을 통해 다양한 개입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 기획자 공동 운영 플랫폼인 WESS에서 활동 중이다. 또한 미국을 기반으로 글로벌하게 운영하고 있는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디렉터이자 큐레이터로 한국 작가를 소개하고 전시를 만드는 일을 했으며, 임충섭과 리차드 터틀의 2인전 ≪How Objects Grasp Their Magic≫(2022)과 염지혜, 정희민, 최상아, 홍이현숙이 참여하는 ≪Your Present≫(2022)를 기획했다.
본문일부
첫 번째 주, 샌정 (13-14 페이지 중)
화가가 흰 화면을 대하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공간을 넘나드는 이 이어짐은 나에게도 새로운 공유 방식 중 하나다. 이것이 어떤 감정적 변화를 만들어 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볼 것인가. 실시간으로 내보내지만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보려 하는가? 그것은 그림이 이야기하는 것인가 내가 얘기하는 것인가?
침묵과, 움직임이 거의 없는 정지에 가까운 화면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내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라이브에서 사람들은 전시를 관람할 때처럼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움직임에 대한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한다. 그들이 어느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머무름의 시간 안에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 역동적인 에너지를 누군가는 발견할 것이다.
이 공간에서 내가 그림을 보는 행위와 그 행위를 바라보는 것 사이가 존재한다. 두 세상은 과연 다른 것인가?
그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시간을 역추적하는 것이다. 흔적을 따라가는 것, 그 순서를 아는 것이 과연 의미 있을까? 그림의 시작과 끝은 과연 중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길을 잃은 것일까? 그림은 과연 소용돌이치는 작가의 마음을 얼마만큼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질문의 시작은 그림의 시작처럼 희미하다. 그저 방향을 가진 붓질이 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든 방향을 연상시킬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한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내 호흡과 그림의 호흡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중략)
공간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붓 끝을 통해 전달되는 추상적인 에너지는 마술적인 힘을 가진다. 염원 혹은 어떤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그것은 보는 이를 그리로 인도하려 노력하지만, 그 붓을 잡았던 이의 역사를 담은 레이어들과 붓의 움직임을 추측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떤 답을 찾으려 한다기보다는 풀리지 않은 무엇인가가 나를 저절로 어디론가 이끄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책소개
이 책은 큐레이터 맹지영이 2021년 2월 22일부터 3월 27일까지 30일동안 다섯 작가(샌정, 이재헌, 임충섭, 정경빈, 최상아)의 작품 1점당 20시간씩(1일 4시간) 총 720시간을 관람하면서 변화하는 생각을 글로 담고, 그 관람의 시간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송출했던 프로젝트의 기록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웨스 WESS는 기획자 11명이 공동으로 운영하며 각자 주어진 기간에 자신의 기획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의 공동운영자 중 한 명인 저자는 2021년 2-3월 5주에 걸쳐 《one at a time》을 기획했다. 이 기간동안 전시 공간은 저자만을 위한 감상의 공간으로 바뀌었고, 다섯 작가의 각 작품은 온전한 감상을 위해 한 주에 하나씩 볼 수 있도록 했다. 저자가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관람객’들은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서 작품이 아닌 그가 감상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큐레이터이자 감상자로서 작품과의 오롯한 만남을 보장받으며 작품을 이해하는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저자의 실험인 동시에 작품을 보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온전한 관람을 갈망하는 큐레이터 맹지영의 시도가 어떻게 변해가고 어디로 도달하게 되는지 그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감상의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목차
들어가며
첫 번째주, 샌정
두 번째주, 최상아
세 번째주, 이재헌
네 번째주, 임충섭
다섯 번째주, 정경빈
관객의 시간
작가의 말
나가며
저자소개
맹지영은 서울과 미국에서 미술과 관련한 공부와 실무를 경험하고, 2009년부터 2020년 4월까지 비영리기관인 두산아트센터의 두산갤러리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두산갤러리의 전시(서울/뉴욕), 교육 프로그램(두산 큐레이터 워크샵, 두산아트스쿨 외)을 기획, 운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의 기관에 신진 및 중진 전시작가의 작가론과 다양한 미술매체에 리뷰 등을 다수 집필했고, 저서로 『스몰토크: 뉴욕에서의 대화』(2015)가 있다. 현재 시각예술분야에서 현장연구와 기획, 그리고 글을 통해 다양한 개입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 기획자 공동 운영 플랫폼인 WESS에서 활동 중이다. 또한 미국을 기반으로 글로벌하게 운영하고 있는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디렉터이자 큐레이터로 한국 작가를 소개하고 전시를 만드는 일을 했으며, 임충섭과 리차드 터틀의 2인전 ≪How Objects Grasp Their Magic≫(2022)과 염지혜, 정희민, 최상아, 홍이현숙이 참여하는 ≪Your Present≫(2022)를 기획했다.
본문일부
첫 번째 주, 샌정 (13-14 페이지 중)
화가가 흰 화면을 대하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공간을 넘나드는 이 이어짐은 나에게도 새로운 공유 방식 중 하나다. 이것이 어떤 감정적 변화를 만들어 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볼 것인가. 실시간으로 내보내지만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보려 하는가? 그것은 그림이 이야기하는 것인가 내가 얘기하는 것인가?
침묵과, 움직임이 거의 없는 정지에 가까운 화면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내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라이브에서 사람들은 전시를 관람할 때처럼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움직임에 대한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한다. 그들이 어느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머무름의 시간 안에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 역동적인 에너지를 누군가는 발견할 것이다.
이 공간에서 내가 그림을 보는 행위와 그 행위를 바라보는 것 사이가 존재한다. 두 세상은 과연 다른 것인가?
그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시간을 역추적하는 것이다. 흔적을 따라가는 것, 그 순서를 아는 것이 과연 의미 있을까? 그림의 시작과 끝은 과연 중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길을 잃은 것일까? 그림은 과연 소용돌이치는 작가의 마음을 얼마만큼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질문의 시작은 그림의 시작처럼 희미하다. 그저 방향을 가진 붓질이 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든 방향을 연상시킬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한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내 호흡과 그림의 호흡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중략)
공간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붓 끝을 통해 전달되는 추상적인 에너지는 마술적인 힘을 가진다. 염원 혹은 어떤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그것은 보는 이를 그리로 인도하려 노력하지만, 그 붓을 잡았던 이의 역사를 담은 레이어들과 붓의 움직임을 추측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떤 답을 찾으려 한다기보다는 풀리지 않은 무엇인가가 나를 저절로 어디론가 이끄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