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미술평론가 김정현이 2014년에서 2023년 사이에 쓴 글 중 37편을 묶은 비평모음집. 저자는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제정한 제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한 이후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현장 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신인 평론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지난 10년의 활동을 돌아보는 『쏟아지는 외부』에서 저자는 미술과 자본의 특수한 관계를 의식하며 “속물적인 인정 투쟁과 비판적 각성의 계기가 뒤섞여” 있는 ‘젊음’의 지평을 상기한다. 지근거리에서 목도한 너무 이른 좌절, 몰락, 죽음의 흔적이 글의 곳곳에 묻어있다. 저자는 실패를 무릅쓰고 비판적 미술을 추구하며, 예술의 신체적 수행성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비평적 관점을 구축한다. 본문은 여섯 개의 장으로 구분했다. [닮기로서의 글쓰기]에서는 시각언어를 문자언어로 미메시스하려는 저자의 문학적 실험을 소개한다. 닮으려는 욕망의 전제는 대상에 대한 긴밀한 애정이다. 이론을 파괴하는 주이상스는 비평을 경계에 세운다. [소진되는 신체의 퍼포먼스]는 저자의 주요 연구 대상인 퍼포먼스에 관해, 첫째, 동시대 미술의 의미심장한 현상으로서 미술과 극장의 교류에 주목하고, 둘째, 장르적 정의에서 이탈해 예술의 신체적 수행성으로 확장된 관점을 보여준다. [페티시 매체 또는 재귀적 질문]은 회화, 조각, 장소와 같이 매체적, 담론적 종말 선언 이후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도구로서의 여행]에서는 저자가 주요 활동지인 서울을 벗어나 국내외 미술 현장에서 발견한 동시대 미술 비평의 단서를 에세이와 리서치 형식을 오가며 풀어낸다. [정체성 정치의 현재]는 청년, 여성, 포스트 식민 주체 등의 소수자 주체를 표방하는 당대의 작업 및 현상에 대한 시각을 담았다. [생존의 윤리]는 아카데미, 기관, 시장 등의 지배적 구조에 동화되지 않고 예술의 윤리를 실천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에 주목했다.
목차
서문
1. 닮기로서의 글쓰기
박정혜—납작한 3차원의 세계에서
숙취 심한 날 (2017)
곽이브—P.와 p.의 대화
기민정—어느 소설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소설
어쩌면…있을지 몰라
이형구 — … 와 …
2. 소진되는 신체의 퍼포먼스
퍼포먼스의 감염 경로는?—퍼포먼스 예술의 동시대성을 찾아서
정금형—구매자를 위한 박물관
기계 안무의 갈림길
윌리엄 켄트리지—체력소진이라는 지표
덤 타입—멀티미디어 퍼포먼스의 삶과 죽음
황수현—초현실, 움직이거나 이끌리거나
퍼포먼스와 사물성
이민경과 이보 딤체프—진정성의 폭력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당신의 정확한 불안
3. 페티시 매체 또는 재귀적 질문
회화에 대하여 (2018~2021)
이제—떠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도착했다
윤지영—(하나의) 조각 이후
장서영—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
박이소—추억 없는 세대를 위한 회고전
4. 도구로서의 여행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직접 볼 수는 없지만—현대미술과 재현의 문제
미술관 소장의 지리학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예술
어느 비평가의 타임캡슐
5. 정체성 정치의 현재
‘우리들’의 공동체, 독립과 고립의 경계에서—신생 공간과 프로젝트 그룹의 문화정치학
미디어 담론에서 영매의 아카이브로
예술가, 장사꾼, 임시변통한 나
배성희—쏟아지는 외부
현아—어디에서 왔습니까?
김우진—바벨의 그림자
방향키 조작하기—우주에서 지상으로
6. 생존의 윤리
김방주—장난감의 모랄
시체와 유령
배민경—예술의 지겨움에 대하여
강기석—무겁게 허우적대는 발
홍세진—차갑게 와 닿는 사물
김지영—생존의 윤리
부록
수록지면 정보
저자 소개
김정현
미술평론가.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써왔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정치 · 경제 · 철학(PEP), 심리학 3전공 학사,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 졸업 및 박사 중퇴. 2015년 제 1회 SeMA 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퍼포먼스 아트 연구자이자 독립 큐레이터로 《마지막 공룡》(2020), 《아무것도 바꾸지마라》(2016~2020), 《퍼포먼스 연대기》(2017) 등을 기획했다.
책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랑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예술을 전공으로서 대학에서 교육받는다는 매우 일반화되었지만 여전히 어색한 현실과 관계가 있을까. 짐작해볼 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림을 보고 나서 이 글을 쓰는 때의 강박을 의식한다. 결국 알 수 있는 건 합리적인 동기나 역사적인 기원 따위가 아니다. 그저 예술가의 유희와 강박이 한쌍이라고만 말해두자. 기민정은 지난 몇 년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며 색감과 모노톤 사이를 번갈아 탐색하는 스스로의 성향을 발견하고 두 가지를 ‘양가성’으로 인식한다.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번갈아 나타나며 전혀 다른 작품의 양상을 드러낸 것 같다는 자가 분석. 작년(2018)에는 그림 안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자아가 합쳐진 것 같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이렇게 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아의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성향을 의식화한다. (기민정—어느 소설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소설, 39페이지)
1960년대 뉴욕에서 남성중심적인 표현주의 회화에 회의를 느낀 캐롤리 슈니먼은 캔버스 회화에 머물지 않고 신체를 탐구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무용수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드슨 댄스 시어터의 발표에도 참여했던 그는 회화와 오브제의 물질성이 강조된 무대 위의 나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통적인 남성적인 미학이 용인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관습적인 표현에서 벗어나서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해방하려는 기획. 대표작인 〈고기의 즐거움Meat Joy〉
(1964)에는 여덟 명의 남녀 무용수가 속옷 차림으로 등장해서 생닭과 소시지와 생선과 페인트가 육체적으로 혼잡스럽게 뒤엉키는데, 밝은 조명에 경쾌한 음악과 가벼운 웃음소리가 가득하게 연출했다. 강박적으로 마녀나 여신 같은 여성 아이콘을 발굴하는 다른 작업들과 달리 여기서는 신체를 특정 젠더에 한정짓지 않고 ‘기계’로 다루며 비서사적 움직임 속에 육체적 현현을 마주하도록 했다. (당신의 정확한 불안, 137페이지)
장파의 회화를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그 이미지와 대조하며 곱씹어보는 것이다. 〈My Little Riot Girl Series〉(2018)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업이다. 두산갤러리 서울의 쇼윈도나 반듯한 사각형 전시장의 벽면에 걸어 단숨에 눈에 들어오는 작업과 구분한 전시 구성을 고려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넉넉히 시간을 들여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한 의자 위에 앉아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자. 화면 안에서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여성이 수런거린다. 조용한 캔버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전시장에 조용히 울리는 음악 소리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느닷없는 사운드에 의해 증폭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회화에 대하여 (2018~2021), 155페이지)
최근에는 관객이 전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관람 문화가 생겼다. ‘인스타그램 친화적 현대미술’이라는 우려 섞인 표현이 등장할 만큼 사진 촬영에 최적화된 미술이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작품 사진은 때로 조잡하고 시시한 미술 작품보다 더 그럴싸한 느낌을 준다. 비공식 기록은 작가의 의도를 배반하기 십상이지만 종이책으로 나오는 전시 도록보다 접근성이 좋고 이미지의 확산이 빨라서 미술 작품의 대체물로서 무시할 수 없어지고 있다. 사실 전시도록은 실제 전시를 편집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작가가 주도해 작품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은폐할 가능성이 있다. 인스타그램은 작가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관객이 작품을 편집하게 만든다. 잘 찍은 사진이든 흔들리고 구도가 엉망인 사진이든 영향력이 아우라를 만드는 시대에 추천 버튼이 많이 눌린다면 상관없다. 이런 새로운 관객에 의해 작품의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아우라는 강화된다.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직접 볼 수는 없지만, 206페이지)
국립현대미술관이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미술의 단일한 보편적 공간으로 순진하게 인식되고 있다면, 그것은 국내 유일이라는 입지 때문일까? 전국의 수많은 공립미술관 중 수도에 위치한 서울 시립미술관은 수집 심포지엄에서 마찬가지로 해당 미술관에 관한 수집 제도사를 논하면서 동시에 지역 공립미술관들이라는 다른 주체를 비교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03년에 시작한 ‘수집 공모제’가 전국적으로 유사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주지하며, 이로 인해 “미술관별로 굳어진 대상작품이 대동소이해지고, 결국 각 미술관 소장품마다 차별성이 없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국내 공립미술관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수집 공모제는 학예연구사 추천제에 비해 분명 각기 다른 미술관의 관점을 반영하기 어렵다. 이러한 공립미술관의 사정을 고려할 때 ‘소장품이 미술관의 정체성’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내 대다수 공립미술관이 각각 보수적이고 대중추수적인 수집 제도로 인해 특성 없이 닮아 있는 기형적인 정상성을 지니게 되었다. (미술관 소장의 지리학, 215페이지)
최근 미술계에서 부상하고 있는 세대론은 ‘예술가의 생존권’ 투쟁과 결합하며 빠르게 지지층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세대론은 미술 자본의 독특성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만다. 미술계에서 노동 착취의 문제는 단 한 번도 젊은 세대나 작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업계’ 전체의 오랜 관행이었다. 계급양극화와 적자생존이야말로 현재의 미술 생태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체제의 왜곡을 세대의 억압으로 가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젊은 것과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거의 자동적이며, 젊음과 나이 듦을 우열로 구분하는 이데올로기는 현대미술의 ‘역사적 전통’이자 자본의 확장 근거이다. 청춘이든 잉여든 88만 원 세대이든 ‘새로운 세대’를 표방하는 이들은 ‘새로운 시장’ 혹은 ‘시장의 확장’을 바라는 욕망을 내비친다. 자본에 대한 미술의 욕망이 더욱 세련되어지고 있다는 현실인식이야말로 최근의 세대론 논쟁에서 깨우쳐야 할 부분이다. (‘우리들’의 공동체, 독립과 고립의 경계에서, 244페이지)
역사적 주제를 대하는 박찬경의 태도는 오래전부터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비난받아왔다. 박찬경은 이러한 비난이 반지성주의에서 나온 것이라 매도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성의 반대에는 반지성주의만 있지 않다. 윤리적 무책임 또한 지성의 반대 지점에서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양극적 사고를 하며 부당한 결론에 도달한 예는 또 있다. 박찬경이 “현대미술은 자신과 세상이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지, 자신의 내면에 뭐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라고 밝혔을 때, 그는 개인의 자아와 내면을 감수성의 영역에 한정해버린다. 그러나 개인의 고유함은 윤리적 선택과 책임의 차원에서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 시대에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박찬경의 관심이 아닌 듯하다. 그는 할머니가 “권력에 무력한 존재이지만, ‘옛 할머니’가 표상하는 인내와 연민은 바로 그 권력을 윤리적으로 능가하는 능동적인 가치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윤리의 문제를 간단한 미학적 상상으로 대체해버린다. (미디어 담론에서 영매의 아카이브로, 251페이지)
책 소개
미술평론가 김정현이 2014년에서 2023년 사이에 쓴 글 중 37편을 묶은 비평모음집. 저자는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제정한 제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한 이후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현장 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신인 평론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지난 10년의 활동을 돌아보는 『쏟아지는 외부』에서 저자는 미술과 자본의 특수한 관계를 의식하며 “속물적인 인정 투쟁과 비판적 각성의 계기가 뒤섞여” 있는 ‘젊음’의 지평을 상기한다. 지근거리에서 목도한 너무 이른 좌절, 몰락, 죽음의 흔적이 글의 곳곳에 묻어있다. 저자는 실패를 무릅쓰고 비판적 미술을 추구하며, 예술의 신체적 수행성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비평적 관점을 구축한다. 본문은 여섯 개의 장으로 구분했다. [닮기로서의 글쓰기]에서는 시각언어를 문자언어로 미메시스하려는 저자의 문학적 실험을 소개한다. 닮으려는 욕망의 전제는 대상에 대한 긴밀한 애정이다. 이론을 파괴하는 주이상스는 비평을 경계에 세운다. [소진되는 신체의 퍼포먼스]는 저자의 주요 연구 대상인 퍼포먼스에 관해, 첫째, 동시대 미술의 의미심장한 현상으로서 미술과 극장의 교류에 주목하고, 둘째, 장르적 정의에서 이탈해 예술의 신체적 수행성으로 확장된 관점을 보여준다. [페티시 매체 또는 재귀적 질문]은 회화, 조각, 장소와 같이 매체적, 담론적 종말 선언 이후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도구로서의 여행]에서는 저자가 주요 활동지인 서울을 벗어나 국내외 미술 현장에서 발견한 동시대 미술 비평의 단서를 에세이와 리서치 형식을 오가며 풀어낸다. [정체성 정치의 현재]는 청년, 여성, 포스트 식민 주체 등의 소수자 주체를 표방하는 당대의 작업 및 현상에 대한 시각을 담았다. [생존의 윤리]는 아카데미, 기관, 시장 등의 지배적 구조에 동화되지 않고 예술의 윤리를 실천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에 주목했다.
목차
서문
1. 닮기로서의 글쓰기
박정혜—납작한 3차원의 세계에서
숙취 심한 날 (2017)
곽이브—P.와 p.의 대화
기민정—어느 소설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소설
어쩌면…있을지 몰라
이형구 — … 와 …
2. 소진되는 신체의 퍼포먼스
퍼포먼스의 감염 경로는?—퍼포먼스 예술의 동시대성을 찾아서
정금형—구매자를 위한 박물관
기계 안무의 갈림길
윌리엄 켄트리지—체력소진이라는 지표
덤 타입—멀티미디어 퍼포먼스의 삶과 죽음
황수현—초현실, 움직이거나 이끌리거나
퍼포먼스와 사물성
이민경과 이보 딤체프—진정성의 폭력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당신의 정확한 불안
3. 페티시 매체 또는 재귀적 질문
회화에 대하여 (2018~2021)
이제—떠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도착했다
윤지영—(하나의) 조각 이후
장서영—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
박이소—추억 없는 세대를 위한 회고전
4. 도구로서의 여행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직접 볼 수는 없지만—현대미술과 재현의 문제
미술관 소장의 지리학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예술
어느 비평가의 타임캡슐
5. 정체성 정치의 현재
‘우리들’의 공동체, 독립과 고립의 경계에서—신생 공간과 프로젝트 그룹의 문화정치학
미디어 담론에서 영매의 아카이브로
예술가, 장사꾼, 임시변통한 나
배성희—쏟아지는 외부
현아—어디에서 왔습니까?
김우진—바벨의 그림자
방향키 조작하기—우주에서 지상으로
6. 생존의 윤리
김방주—장난감의 모랄
시체와 유령
배민경—예술의 지겨움에 대하여
강기석—무겁게 허우적대는 발
홍세진—차갑게 와 닿는 사물
김지영—생존의 윤리
부록
수록지면 정보
저자 소개
김정현
미술평론가.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써왔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정치 · 경제 · 철학(PEP), 심리학 3전공 학사,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 졸업 및 박사 중퇴. 2015년 제 1회 SeMA 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퍼포먼스 아트 연구자이자 독립 큐레이터로 《마지막 공룡》(2020), 《아무것도 바꾸지마라》(2016~2020), 《퍼포먼스 연대기》(2017) 등을 기획했다.
책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랑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예술을 전공으로서 대학에서 교육받는다는 매우 일반화되었지만 여전히 어색한 현실과 관계가 있을까. 짐작해볼 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림을 보고 나서 이 글을 쓰는 때의 강박을 의식한다. 결국 알 수 있는 건 합리적인 동기나 역사적인 기원 따위가 아니다. 그저 예술가의 유희와 강박이 한쌍이라고만 말해두자. 기민정은 지난 몇 년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며 색감과 모노톤 사이를 번갈아 탐색하는 스스로의 성향을 발견하고 두 가지를 ‘양가성’으로 인식한다.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번갈아 나타나며 전혀 다른 작품의 양상을 드러낸 것 같다는 자가 분석. 작년(2018)에는 그림 안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자아가 합쳐진 것 같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이렇게 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아의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성향을 의식화한다. (기민정—어느 소설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소설, 39페이지)
1960년대 뉴욕에서 남성중심적인 표현주의 회화에 회의를 느낀 캐롤리 슈니먼은 캔버스 회화에 머물지 않고 신체를 탐구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무용수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드슨 댄스 시어터의 발표에도 참여했던 그는 회화와 오브제의 물질성이 강조된 무대 위의 나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통적인 남성적인 미학이 용인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관습적인 표현에서 벗어나서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해방하려는 기획. 대표작인 〈고기의 즐거움Meat Joy〉
(1964)에는 여덟 명의 남녀 무용수가 속옷 차림으로 등장해서 생닭과 소시지와 생선과 페인트가 육체적으로 혼잡스럽게 뒤엉키는데, 밝은 조명에 경쾌한 음악과 가벼운 웃음소리가 가득하게 연출했다. 강박적으로 마녀나 여신 같은 여성 아이콘을 발굴하는 다른 작업들과 달리 여기서는 신체를 특정 젠더에 한정짓지 않고 ‘기계’로 다루며 비서사적 움직임 속에 육체적 현현을 마주하도록 했다. (당신의 정확한 불안, 137페이지)
장파의 회화를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그 이미지와 대조하며 곱씹어보는 것이다. 〈My Little Riot Girl Series〉(2018)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업이다. 두산갤러리 서울의 쇼윈도나 반듯한 사각형 전시장의 벽면에 걸어 단숨에 눈에 들어오는 작업과 구분한 전시 구성을 고려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넉넉히 시간을 들여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한 의자 위에 앉아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자. 화면 안에서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여성이 수런거린다. 조용한 캔버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전시장에 조용히 울리는 음악 소리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느닷없는 사운드에 의해 증폭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회화에 대하여 (2018~2021), 155페이지)
최근에는 관객이 전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관람 문화가 생겼다. ‘인스타그램 친화적 현대미술’이라는 우려 섞인 표현이 등장할 만큼 사진 촬영에 최적화된 미술이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작품 사진은 때로 조잡하고 시시한 미술 작품보다 더 그럴싸한 느낌을 준다. 비공식 기록은 작가의 의도를 배반하기 십상이지만 종이책으로 나오는 전시 도록보다 접근성이 좋고 이미지의 확산이 빨라서 미술 작품의 대체물로서 무시할 수 없어지고 있다. 사실 전시도록은 실제 전시를 편집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작가가 주도해 작품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은폐할 가능성이 있다. 인스타그램은 작가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관객이 작품을 편집하게 만든다. 잘 찍은 사진이든 흔들리고 구도가 엉망인 사진이든 영향력이 아우라를 만드는 시대에 추천 버튼이 많이 눌린다면 상관없다. 이런 새로운 관객에 의해 작품의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아우라는 강화된다.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직접 볼 수는 없지만, 206페이지)
국립현대미술관이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미술의 단일한 보편적 공간으로 순진하게 인식되고 있다면, 그것은 국내 유일이라는 입지 때문일까? 전국의 수많은 공립미술관 중 수도에 위치한 서울 시립미술관은 수집 심포지엄에서 마찬가지로 해당 미술관에 관한 수집 제도사를 논하면서 동시에 지역 공립미술관들이라는 다른 주체를 비교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03년에 시작한 ‘수집 공모제’가 전국적으로 유사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주지하며, 이로 인해 “미술관별로 굳어진 대상작품이 대동소이해지고, 결국 각 미술관 소장품마다 차별성이 없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국내 공립미술관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수집 공모제는 학예연구사 추천제에 비해 분명 각기 다른 미술관의 관점을 반영하기 어렵다. 이러한 공립미술관의 사정을 고려할 때 ‘소장품이 미술관의 정체성’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내 대다수 공립미술관이 각각 보수적이고 대중추수적인 수집 제도로 인해 특성 없이 닮아 있는 기형적인 정상성을 지니게 되었다. (미술관 소장의 지리학, 215페이지)
최근 미술계에서 부상하고 있는 세대론은 ‘예술가의 생존권’ 투쟁과 결합하며 빠르게 지지층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세대론은 미술 자본의 독특성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만다. 미술계에서 노동 착취의 문제는 단 한 번도 젊은 세대나 작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업계’ 전체의 오랜 관행이었다. 계급양극화와 적자생존이야말로 현재의 미술 생태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체제의 왜곡을 세대의 억압으로 가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젊은 것과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거의 자동적이며, 젊음과 나이 듦을 우열로 구분하는 이데올로기는 현대미술의 ‘역사적 전통’이자 자본의 확장 근거이다. 청춘이든 잉여든 88만 원 세대이든 ‘새로운 세대’를 표방하는 이들은 ‘새로운 시장’ 혹은 ‘시장의 확장’을 바라는 욕망을 내비친다. 자본에 대한 미술의 욕망이 더욱 세련되어지고 있다는 현실인식이야말로 최근의 세대론 논쟁에서 깨우쳐야 할 부분이다. (‘우리들’의 공동체, 독립과 고립의 경계에서, 244페이지)
역사적 주제를 대하는 박찬경의 태도는 오래전부터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비난받아왔다. 박찬경은 이러한 비난이 반지성주의에서 나온 것이라 매도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성의 반대에는 반지성주의만 있지 않다. 윤리적 무책임 또한 지성의 반대 지점에서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양극적 사고를 하며 부당한 결론에 도달한 예는 또 있다. 박찬경이 “현대미술은 자신과 세상이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지, 자신의 내면에 뭐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라고 밝혔을 때, 그는 개인의 자아와 내면을 감수성의 영역에 한정해버린다. 그러나 개인의 고유함은 윤리적 선택과 책임의 차원에서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 시대에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박찬경의 관심이 아닌 듯하다. 그는 할머니가 “권력에 무력한 존재이지만, ‘옛 할머니’가 표상하는 인내와 연민은 바로 그 권력을 윤리적으로 능가하는 능동적인 가치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윤리의 문제를 간단한 미학적 상상으로 대체해버린다. (미디어 담론에서 영매의 아카이브로, 25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