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원 (지은이)
현실문화A
2023-05-22
"무엇이 이토록 방대한 양의 기록을 남기도록 추동했을까? 왜 이 사진들은 기가 막히게 잘 찍히고 아름답기까지 한가? 카메라 강국, 사진 재료의 제조국, 그것도 모자라 배에 무거운 카메라를 싣고 조선에 들어와 전국을 돌며 사진을 찍고 조사하여 출판과 전시, 아카이빙을 했던 나라. 세기의 언어로 ‘문명국’, 지금의 언어로 제국이 아니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 국가’ 일본의 존재감을 보다 견고한 학문적 틀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 책머리에서
일본은 어떻게 ‘사진 국가’가 되었는가?
근대의 초입에서 공유된 사진의 힘
일본을 ‘사진 국가’라고 명명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광학 기술에서부터, 화학 및 재료, 카메라 제조, 나아가서 출판 및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명실상부한 최강의 사진 국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진 국가의 전부는 아니다. 사진 국가의 정말로 무서운 힘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영역에 있었다. 각종 조사와 기록 사업을 포괄하는 방대한 아카이브 혹은 기록 체계가 그것이다.
『사진 국가』는 19세기 중후반부터 사진과 국가 간의 연대 혹은 공모가 개시되었던 시점에 주목해 19세기 기록 사진의 정치적 의미를 살핀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사진의 힘, 사진의 문명적 활용 가능성을 철저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저자는 그렇게 해서 확립된 것이 사진을 매개로 한 근대적 기록, 정보화, 시각화의 체계였다고 말한다. 사실 이 체계의 무서운 힘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조선의 고고학, 민속학, 인류학적 조사 사진을 비롯해, 식물, 어류 등의 자원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제국 일본의 아카이브를 대면하게 되면, 한편으론 그 치밀함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방대한 양적 규모에 놀라게 된다. 『사진 국가』가 비록 식민지 조선을 다루고 있진 않지만, 저자는 식민지 아카이브 사진의 기원이 바로 메이지 초기의 이 기록 사진에 연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 국가의 초석인 된 이 아카이빙 체계는 활용도가 매우 높아 일단 만들어지면 “모든 대상을 균질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진다. 그 힘을 추동하는 것은 거대한 권력의 작동이라기보다는, 사진 사이즈, 포맷, 앵글, 각도, 조명의 표준화와 같은 지극히 미시적인 맥락”(11쪽)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이 시각 체계에서는 그 대상이 식민지 조선이든 홋카이도든 관계없이 장소 간의 맥락, 미세한 차이가 제거되어 모두 비슷한 풍경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진들은 왜 우리 눈에 잘 띠지 않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들이 유명 사진작가의 작품이 아니기에, 예술로 인정받지 않기에, 혹은 풍경이나 초상처럼 우리가 아는 사진작품이 즐겨 다루는 소재나 주제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이 사진들이야말로 작품들은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사진 국가’를 태동시킨 것이다. 사진은 국가와 공조하면서 문명개화를 향해 다른 무엇보다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 사진들의 강력한 후원자가 바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대의 초입에서 일본이 이처럼 사진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사진의 역사가 중점을 두고 기술하는 사진가 개인의 표현 능력 문제를 훌쩍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진 국가』는 이미 19세기 중후반부터 만개한 사진에 관한 다양한 언어와 담론, 그리고 사진 관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다양한 주체들의 노력, 사진이 국가 공무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주체인 관료(공무원)와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계기, 1930년대에 이르러 지역의 민간인이 사진과 국가의 연대를 적극 도모하는 일 등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영업) 사진가와 지식인 관료, 국가, 지역민 모두가 문명개화, 나아가 제국의 팽창을 향해 질주하는 프로젝트에서 ‘사진 국가’는 필연적인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진의 쓸모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했나?
만국박람회 참가에서부터 천황의 순례까지
사진은 이미 1850년대의 막부에서부터 사진의 전례 없는 기록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서구에서 사진의 발명을 공식화한 지 불과 십수 년 남짓 지난 시점인 셈이다.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사진은 국가의 비전을 가장 명확하게 투사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각 장치로 인식되었다. 저자는 사진이 일찍부터 국가 차원의 기록, 정보, 시각화의 체계로 구상되기 시작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손으로 그릴 필요가 없는 기계적 공정, 대상과의 실질적인 대면을 요구하는 재현 메커니즘”(27쪽), 그리하여 대상을 정확하게 모사하고 이를 다시 복제해 쓸 수 있는 사진의 경제적 효율성을 신정부의 관료들이 놓칠 리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사진의 의미와 효과가 이 매체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낡은 질서를 개편해서 새로운 ‘일본’을 세우려는 국가의 요청 혹은 필요에 따라 피사체를 기록하는 ‘치술의 일조’였던 것이다. 메이지 정부를 이끌던 이 관료들은 사진으로 유물을 조사해 해외 박람회에 출품하고(1장), 구미에서 생산된 사진을 참조해 세계를 일본식으로 도해한 각종 지리서를 편찬했다(2장). 또한 사라져가는 고건축과 고기구물을 조사해 사진으로 기록하고, 이를 출판해 구미 독자에게 일본을 더없이 매혹적인 이미지로 어필하는가 하면(3장), 카메라를 천황의 순행에 동행토록 해 순행 사진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했다(4장). 막대한 예산을 배정해 홋카이도의 식민 개척 상황을 기록한 사진은 정부가 추진 중인 근대화 청사진으로서 국내외 박람회에 출품되어 일본의 근대화 사업을 힘주어 자랑하는 중요한 장치였다(5장). 『사진 국가』는 이처럼 사진의 쓰임새가 공적으로 사회화되는 계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진의 다양한 활용에 담긴 이야기를 충실히 기술한다.
정전(canon)에서 비껴나 있는 복수의 사진(들)
다종다양한 개념의 사진(들)과 그 경계를 추적하다
『사진 국가』는 국가가 요청한 방대한 조사‧기록 사업에서 공적인 기술로 인정받고 활용되는 맥락을 꼼꼼하게 재구성해낸다. 그때 사진은 결코 단일한 언어, 개념, 물질로 규정되지 않았다. 이 사진들은 개인의 작품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구미의 대문자 사진 개념에서 보면 이질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저자는 서구의 정전화된 대문자 사진의 개념으로는 당시의 사진이 수행해낸 쓰임새, 담론, 제도 등을 포괄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실 대문자 사진은 이 매체가 펼쳐낼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수많은 사진‘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메이지 근대의 프로젝트를 기획한 지식인 관료들에게 사진은 ‘문명’을 전유하면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요긴한 소품과도 같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이 소품의 쓰임새를 완벽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체와 기술을 직접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사진에서 기대했던 활용 가능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었다. 저자는 “식민지 아카이브 사진의 기원이 된 메이지 초기의 기록 사진을 조사하다 보니, 막상 사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개념이었고, 사진이 아닌 물질과 매체까지 아우르는 이질적인 ‘사진(들)’이 어지럽게 얽힌 혼성의 풍경이 펼쳐”(11쪽)져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국가』는 대문자 사진의 역사에서 사진(들)의 역사, 사진의 역사(들)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안한다. 저자는 여기저기 산재한 문헌과 아카이브에서 당시에 통용되던 사진과 관련한 다양한 언어와 담론, 제도에 주목해 이것들을 이질적인 개념어로 순차적으로 정리해 보인다. ‘박진한 모사’로서의 사진(1장), 그림자를 잡는 그림을 뜻하는 ‘착영화’로서의 사진(2장), 사진과 석판화, 채색화의 혼합물로서의 절충주의 사진(3장), 천황의 시선을 따라가는 시선의 기록으로서의 사진(4장), 파노라마 사진을 횡축의 두루마리 비단에 부착한 ‘사진 두루마리’(5장) 등은 확실히 구미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양상이다. 저자는 이토록 여럿인 사진의 개념과 실천, 물질과 담론을 과연 단일한 의미의 ‘사진’으로 묶어 사유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오히려 ‘사진’을 ‘사진적인 것’들로 펼쳐내는 작업, 복수형 ‘사진(들)’의 유연한 경계를 포괄하는 작업이야말로 사진에 관한 새로운 역사 서술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사진(들)의 역사, 사진의 역사(들)이 있었다면, 이질적인 주체들도 있었다. 『사진 국가』에는 저명한 작가로서의 사진가도 등장하지 않고, 형식이나 주제에 기반한 이미지 분석과도 거리를 둔다. 대신에 영업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업자들이 소환되고 사진을 공무에 활용했던 지식인 관료가 등장한다. 각각의 장은 이들의 에피소드가 주를 이룬다. 또한 1930년대 후반 들어, 사진과 국가의 연대를 새로운 차원으로 주도하는 주체가 등장하는데, 지역의 민간인이 그들이었다. 중산층이 확대되고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민간인 스스로가 자체적인 조사와 기록, 수집과 배열, 출판과 전시 행위의 적극적인 주체가 된 것이다. 이에 또 다른 종류의 기록 사진이 거대한 국가 아카이브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된다. 이 모든 주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진사에서는 누락된 것들이기에 사진사에서는 이질적인 장면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사진과 더불어 국가주의적 기획에 박차를 가하면서 비로소 매체에 대한 감각, 기술의 속성, 물질의 체계를 이해하는 사진술의 주체이자 사용자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들이 구축해낸 사진이라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비로소 국가 공무에 필요한 기록, 정보, 시각화의 강력한 아카이빙의 체계가 나올 수 있었으며, 일본은 그렇게 일찍부터 ‘사진 국가’가 되었다.
목차
책머리에
들어가며
1. 공무(公務)로서의 사진
2. 신구 사이의 골짜기에 걸터앉은 사진(들)
3. 사진과 국가의 공조
4. 책의 구성
제1장 ‘작지 않은 기술’: 19세기 후반의 지식 공간과 사진
1. 개성소의 사진 실험
2. 박진한 모사의 사진, 포토그래피의 번역어 사진
3. 인조물로서의 사진, 인조물을 찍는 사진
4. 유물과 풍속의 기록
제2장 그림자를 잡는 그림: 사진, 세계지리, 일본의 자기 표상
1. 세계라는 모자이크
2. 만국에서 지리로
3. 착영화(捉影画), 후오도쿠라히, 사진
4. 『만국사진첩』과 근대성의 구조
5. 자기 표상의 부재
6. 사진, 주체화의 기술
제3장 사라져가는 것의 포착: 구에도성(旧江戸城) 조사와 옛것의 기록
1. 저물어가는 성(城)의 시대
2. 호고가의 에도성 조사
3. 『관고도설』의 ‘일본풍’과 절충주의
4. 세기 고증학과 도보(図譜)의 의미
5. ‘사진’이라는 신구고금의 틈새
제4장 천황의 시선을 따라서: 메이지 천황의 순행과 명소 사진의 성립
1. 한 장의 기록 사진에서부터
2. 순행의 기록 - 목판화, 사진, 회화
3. 천람의 시선 구조
4. ‘명소 사진’의 성립
5. 천람에서 전람으로
제5장 북방으로의 우회: ‘홋카이도 사진’과 일본 사진의 원점
1. ‘홋카이도 사진’의 재발견
2. 홋카이도 개척과 사진술의 도입
3. 파노라마 사진
4. 《사진 100년》전과 ‘기록’의 의미
5. 프로보크 스타일
나오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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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맥길대학(McGill University) 미술사학과에서 근대기 일본의 사진술 도입과 풍경 인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 근현대미술과 시각문화, 사진사, 물질문화, 기록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최근 논문으로 「Sasa[]의 현행과 기록의 미술」(『한국근현대미술사학』 44, 2022), 「식민지 시대 ‘예술사진’과 풍경 이미지의 생산」(『미술사학』 39, 2020), 「불상과 사진: 도몬 켄의 고사순례와 20세기 중반의 ‘일본미술’」(『일본비평』 20, 2019) 등을 발표했고, 공저로 The Affect of Difference: Representations of Race in East Asian Empir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 『예술의 주체 - 한국 회화사의 에이전시(agency)를 찾다』(아트북스, 2022) 등이 있다.
"무엇이 이토록 방대한 양의 기록을 남기도록 추동했을까? 왜 이 사진들은 기가 막히게 잘 찍히고 아름답기까지 한가? 카메라 강국, 사진 재료의 제조국, 그것도 모자라 배에 무거운 카메라를 싣고 조선에 들어와 전국을 돌며 사진을 찍고 조사하여 출판과 전시, 아카이빙을 했던 나라. 세기의 언어로 ‘문명국’, 지금의 언어로 제국이 아니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 국가’ 일본의 존재감을 보다 견고한 학문적 틀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 책머리에서
일본은 어떻게 ‘사진 국가’가 되었는가?
근대의 초입에서 공유된 사진의 힘
일본을 ‘사진 국가’라고 명명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광학 기술에서부터, 화학 및 재료, 카메라 제조, 나아가서 출판 및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명실상부한 최강의 사진 국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진 국가의 전부는 아니다. 사진 국가의 정말로 무서운 힘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영역에 있었다. 각종 조사와 기록 사업을 포괄하는 방대한 아카이브 혹은 기록 체계가 그것이다.
『사진 국가』는 19세기 중후반부터 사진과 국가 간의 연대 혹은 공모가 개시되었던 시점에 주목해 19세기 기록 사진의 정치적 의미를 살핀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사진의 힘, 사진의 문명적 활용 가능성을 철저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저자는 그렇게 해서 확립된 것이 사진을 매개로 한 근대적 기록, 정보화, 시각화의 체계였다고 말한다. 사실 이 체계의 무서운 힘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조선의 고고학, 민속학, 인류학적 조사 사진을 비롯해, 식물, 어류 등의 자원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제국 일본의 아카이브를 대면하게 되면, 한편으론 그 치밀함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방대한 양적 규모에 놀라게 된다. 『사진 국가』가 비록 식민지 조선을 다루고 있진 않지만, 저자는 식민지 아카이브 사진의 기원이 바로 메이지 초기의 이 기록 사진에 연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 국가의 초석인 된 이 아카이빙 체계는 활용도가 매우 높아 일단 만들어지면 “모든 대상을 균질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진다. 그 힘을 추동하는 것은 거대한 권력의 작동이라기보다는, 사진 사이즈, 포맷, 앵글, 각도, 조명의 표준화와 같은 지극히 미시적인 맥락”(11쪽)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이 시각 체계에서는 그 대상이 식민지 조선이든 홋카이도든 관계없이 장소 간의 맥락, 미세한 차이가 제거되어 모두 비슷한 풍경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진들은 왜 우리 눈에 잘 띠지 않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들이 유명 사진작가의 작품이 아니기에, 예술로 인정받지 않기에, 혹은 풍경이나 초상처럼 우리가 아는 사진작품이 즐겨 다루는 소재나 주제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이 사진들이야말로 작품들은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사진 국가’를 태동시킨 것이다. 사진은 국가와 공조하면서 문명개화를 향해 다른 무엇보다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 사진들의 강력한 후원자가 바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대의 초입에서 일본이 이처럼 사진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사진의 역사가 중점을 두고 기술하는 사진가 개인의 표현 능력 문제를 훌쩍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진 국가』는 이미 19세기 중후반부터 만개한 사진에 관한 다양한 언어와 담론, 그리고 사진 관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다양한 주체들의 노력, 사진이 국가 공무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주체인 관료(공무원)와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계기, 1930년대에 이르러 지역의 민간인이 사진과 국가의 연대를 적극 도모하는 일 등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영업) 사진가와 지식인 관료, 국가, 지역민 모두가 문명개화, 나아가 제국의 팽창을 향해 질주하는 프로젝트에서 ‘사진 국가’는 필연적인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진의 쓸모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했나?
만국박람회 참가에서부터 천황의 순례까지
사진은 이미 1850년대의 막부에서부터 사진의 전례 없는 기록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서구에서 사진의 발명을 공식화한 지 불과 십수 년 남짓 지난 시점인 셈이다.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사진은 국가의 비전을 가장 명확하게 투사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각 장치로 인식되었다. 저자는 사진이 일찍부터 국가 차원의 기록, 정보, 시각화의 체계로 구상되기 시작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손으로 그릴 필요가 없는 기계적 공정, 대상과의 실질적인 대면을 요구하는 재현 메커니즘”(27쪽), 그리하여 대상을 정확하게 모사하고 이를 다시 복제해 쓸 수 있는 사진의 경제적 효율성을 신정부의 관료들이 놓칠 리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사진의 의미와 효과가 이 매체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낡은 질서를 개편해서 새로운 ‘일본’을 세우려는 국가의 요청 혹은 필요에 따라 피사체를 기록하는 ‘치술의 일조’였던 것이다. 메이지 정부를 이끌던 이 관료들은 사진으로 유물을 조사해 해외 박람회에 출품하고(1장), 구미에서 생산된 사진을 참조해 세계를 일본식으로 도해한 각종 지리서를 편찬했다(2장). 또한 사라져가는 고건축과 고기구물을 조사해 사진으로 기록하고, 이를 출판해 구미 독자에게 일본을 더없이 매혹적인 이미지로 어필하는가 하면(3장), 카메라를 천황의 순행에 동행토록 해 순행 사진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했다(4장). 막대한 예산을 배정해 홋카이도의 식민 개척 상황을 기록한 사진은 정부가 추진 중인 근대화 청사진으로서 국내외 박람회에 출품되어 일본의 근대화 사업을 힘주어 자랑하는 중요한 장치였다(5장). 『사진 국가』는 이처럼 사진의 쓰임새가 공적으로 사회화되는 계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진의 다양한 활용에 담긴 이야기를 충실히 기술한다.
정전(canon)에서 비껴나 있는 복수의 사진(들)
다종다양한 개념의 사진(들)과 그 경계를 추적하다
『사진 국가』는 국가가 요청한 방대한 조사‧기록 사업에서 공적인 기술로 인정받고 활용되는 맥락을 꼼꼼하게 재구성해낸다. 그때 사진은 결코 단일한 언어, 개념, 물질로 규정되지 않았다. 이 사진들은 개인의 작품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구미의 대문자 사진 개념에서 보면 이질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저자는 서구의 정전화된 대문자 사진의 개념으로는 당시의 사진이 수행해낸 쓰임새, 담론, 제도 등을 포괄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실 대문자 사진은 이 매체가 펼쳐낼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수많은 사진‘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메이지 근대의 프로젝트를 기획한 지식인 관료들에게 사진은 ‘문명’을 전유하면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요긴한 소품과도 같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이 소품의 쓰임새를 완벽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체와 기술을 직접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사진에서 기대했던 활용 가능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었다. 저자는 “식민지 아카이브 사진의 기원이 된 메이지 초기의 기록 사진을 조사하다 보니, 막상 사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개념이었고, 사진이 아닌 물질과 매체까지 아우르는 이질적인 ‘사진(들)’이 어지럽게 얽힌 혼성의 풍경이 펼쳐”(11쪽)져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국가』는 대문자 사진의 역사에서 사진(들)의 역사, 사진의 역사(들)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안한다. 저자는 여기저기 산재한 문헌과 아카이브에서 당시에 통용되던 사진과 관련한 다양한 언어와 담론, 제도에 주목해 이것들을 이질적인 개념어로 순차적으로 정리해 보인다. ‘박진한 모사’로서의 사진(1장), 그림자를 잡는 그림을 뜻하는 ‘착영화’로서의 사진(2장), 사진과 석판화, 채색화의 혼합물로서의 절충주의 사진(3장), 천황의 시선을 따라가는 시선의 기록으로서의 사진(4장), 파노라마 사진을 횡축의 두루마리 비단에 부착한 ‘사진 두루마리’(5장) 등은 확실히 구미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양상이다. 저자는 이토록 여럿인 사진의 개념과 실천, 물질과 담론을 과연 단일한 의미의 ‘사진’으로 묶어 사유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오히려 ‘사진’을 ‘사진적인 것’들로 펼쳐내는 작업, 복수형 ‘사진(들)’의 유연한 경계를 포괄하는 작업이야말로 사진에 관한 새로운 역사 서술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사진(들)의 역사, 사진의 역사(들)이 있었다면, 이질적인 주체들도 있었다. 『사진 국가』에는 저명한 작가로서의 사진가도 등장하지 않고, 형식이나 주제에 기반한 이미지 분석과도 거리를 둔다. 대신에 영업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업자들이 소환되고 사진을 공무에 활용했던 지식인 관료가 등장한다. 각각의 장은 이들의 에피소드가 주를 이룬다. 또한 1930년대 후반 들어, 사진과 국가의 연대를 새로운 차원으로 주도하는 주체가 등장하는데, 지역의 민간인이 그들이었다. 중산층이 확대되고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민간인 스스로가 자체적인 조사와 기록, 수집과 배열, 출판과 전시 행위의 적극적인 주체가 된 것이다. 이에 또 다른 종류의 기록 사진이 거대한 국가 아카이브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된다. 이 모든 주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진사에서는 누락된 것들이기에 사진사에서는 이질적인 장면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사진과 더불어 국가주의적 기획에 박차를 가하면서 비로소 매체에 대한 감각, 기술의 속성, 물질의 체계를 이해하는 사진술의 주체이자 사용자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들이 구축해낸 사진이라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비로소 국가 공무에 필요한 기록, 정보, 시각화의 강력한 아카이빙의 체계가 나올 수 있었으며, 일본은 그렇게 일찍부터 ‘사진 국가’가 되었다.
목차
책머리에
들어가며
1. 공무(公務)로서의 사진
2. 신구 사이의 골짜기에 걸터앉은 사진(들)
3. 사진과 국가의 공조
4. 책의 구성
제1장 ‘작지 않은 기술’: 19세기 후반의 지식 공간과 사진
1. 개성소의 사진 실험
2. 박진한 모사의 사진, 포토그래피의 번역어 사진
3. 인조물로서의 사진, 인조물을 찍는 사진
4. 유물과 풍속의 기록
제2장 그림자를 잡는 그림: 사진, 세계지리, 일본의 자기 표상
1. 세계라는 모자이크
2. 만국에서 지리로
3. 착영화(捉影画), 후오도쿠라히, 사진
4. 『만국사진첩』과 근대성의 구조
5. 자기 표상의 부재
6. 사진, 주체화의 기술
제3장 사라져가는 것의 포착: 구에도성(旧江戸城) 조사와 옛것의 기록
1. 저물어가는 성(城)의 시대
2. 호고가의 에도성 조사
3. 『관고도설』의 ‘일본풍’과 절충주의
4. 세기 고증학과 도보(図譜)의 의미
5. ‘사진’이라는 신구고금의 틈새
제4장 천황의 시선을 따라서: 메이지 천황의 순행과 명소 사진의 성립
1. 한 장의 기록 사진에서부터
2. 순행의 기록 - 목판화, 사진, 회화
3. 천람의 시선 구조
4. ‘명소 사진’의 성립
5. 천람에서 전람으로
제5장 북방으로의 우회: ‘홋카이도 사진’과 일본 사진의 원점
1. ‘홋카이도 사진’의 재발견
2. 홋카이도 개척과 사진술의 도입
3. 파노라마 사진
4. 《사진 100년》전과 ‘기록’의 의미
5. 프로보크 스타일
나오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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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맥길대학(McGill University) 미술사학과에서 근대기 일본의 사진술 도입과 풍경 인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 근현대미술과 시각문화, 사진사, 물질문화, 기록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최근 논문으로 「Sasa[]의 현행과 기록의 미술」(『한국근현대미술사학』 44, 2022), 「식민지 시대 ‘예술사진’과 풍경 이미지의 생산」(『미술사학』 39, 2020), 「불상과 사진: 도몬 켄의 고사순례와 20세기 중반의 ‘일본미술’」(『일본비평』 20, 2019) 등을 발표했고, 공저로 The Affect of Difference: Representations of Race in East Asian Empir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 『예술의 주체 - 한국 회화사의 에이전시(agency)를 찾다』(아트북스, 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