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왜 다시 민중인가? 왜 민중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한가? 민중은 정말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는가? 민중이란 단어 자체가 일상 언어에서 퇴화된 지 오래인 지금, 이 ‘시대착오적’ 단어가 왜 다시 소환되어야 하고, 왜 다시 논의되어야 하는가? 디디-위베르만은 우리 시대 예술가와 역사가가 수행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민중의 존재를 ‘노출’하고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술사가이자 이미지 비평가인 그가 인류학, 사회학 혹은 정치학의 논의 대상에 더욱 적절해 보이는 민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들이 노출된다
오늘날 민중들이, 그리고 민중들의 재현이 위협받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의 이러한 생각은 이 책의 도입부 첫 번째 도판이 주는 시각적 충격과 함께 개진된다. 역사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찢겨진 익명의 참호전 희생자의 ‘깨진 얼굴’ 초상사진(25쪽 도판)은 이 책이 미술사, 역사철학, 이미지 인류학이 교차하는 사유 지대에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첫 번째 이미지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후 전개되는 다섯 개 장에 걸쳐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즉, 민중들에게 ‘대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이 절단된 얼굴 이미지에 대한 응답은 유려한 산문 텍스트로 책을 마무리하는 다섯 번째 장인 에필로그를 통해 이루어진다. 왕빙의 영화 '이름 없는 남자'에서 취한 12장의 스틸 이미지는 민중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역사에 의해 말소되고 훼손된 민중의 이미지인 첫 번째 도판과, 시적인 형상으로 민중의 존엄성을 재발견한 ‘이름 없는 남자’의 이미지 사이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텍스트를 따라 배치된다.
민중들의 시학
—이미지로 사유하기
이 책에는 민중과 관련된 총 59개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의 데생과 판화를 비롯해, 필리프 바쟁의 초상사진, 뤼미에르 형제의 기록영화, 파솔리니와 로셀리니의 픽션영화, 왕빙의 다큐멘터리 영화, 데마르티노의 사진 기록물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물론 이른바 ‘이미지 공간’ 속에서 찾아낸 인류학적 자료까지 아우른다. 일종의 ‘메타아카이브’라 할 수 있는 이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잔존의 이미지이며, 또한 각각이 이질적인 시간 속에서 생산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선형적인 역사적 서사를 전개하기 위한 예시가 아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이질적 이미지들을 『민중들의 이미지』 전반에 걸쳐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을 야기하는 몽타주 형식으로 제시한다. 이질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몽타주를 이루는 저자의 이 독특한 전개 방식은 민중의 이미지에 대한 고착된 사유 패턴 대신에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선형적인 전개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독자들이 로렌초 데메디치의 장례식 데스마스크 초상 등의 역사적인 이미지를 대면하기 전에 사진가이자 의사인 필리프 바쟁의 사진 작업 <얼굴> 시리즈가 먼저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는 데서도 입증된다. ‘얼굴’과 ‘시선’은 이 책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이다. 개인과 집단이 교차하는 지점이자 타자를 인식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민중들의 이미지도 들쭉날쭉하다. 파리 코뮌 가담자 12명의 시신이 담긴 관을 찍은 사진, 렘브란트와 고야로 대표되는 소시민들 그림, 또한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 랭보가 그리는 민중, 아비 바르부르크의 이미지 아틀라스인 므네모시네(Mnemosyne) 프로젝트도 소환된다. 그런 후에 뤼미에르 형제의 유명한 공장 출구 장면에 출현하는 민중 이미지에서 예이젠시테인과 파솔리니의 리얼리즘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나치즘의 선전 이미지와 소비에트 및 미국의 군국주의 이미지에서 재현된 민중들의 모습까지 그야말로 민중들의 (이미지) 전체 역사를 여행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냥 편안한 여행은 될 수 없다. 저자는 예술과 비예술을 포괄하는 이 들쑥날쑥한 민중들의 이미지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 이 이미지들은 어떤 선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 나아가 민중들을 구성하는 이 이미지들에 어떤 질문을 제기할 것인지를 반복적으로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디디-위베르만의 작업을 한마디로 축약한 ‘이미지로 사유하기’의 진면목이다.
민중들(의 위기)의 노출
—민중들의 노출의 역설
민중들이, 민중들의 재현이 위협받고 있다는 디디-위베르만의 문제의식은 우리 현대성의 근본적인 모순을 관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날 민중들은 정치적인 위기, 육체적인 위기와 아울러 미적인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저자는 대의민주주의의 도래 이후 현대성의 경향 중 하나가 다양한 형태로 민중이 출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출된 민중은 한편으로는 민중이 역사의 무대에 들어섰고, 그들이 정치적, 미적 재현의 공간에서 가시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중들의 노출에는 그들이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만한 일련의 위협적인 조건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의 ‘노출’이라는 말에는 눈에 보이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민중들의 노출이 축소되고 결핍된 현상은 우리가 마땅히 봐야 하는 것이 통제되고 검열 받고 박탈되는 데서 비롯된다. 반면에 민중들에 대한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는 우리 눈을 멀게 한다. 틀에 박힌 이미지로 반복되는 과잉 노출은 민중들을 비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종국에 그들을 사라지게 할 위협적 조건이다.
현대 사회에서 ‘민중’이라는 기호가 부풀리는 현상은 민중들이 끊임없이 노출되고 인용되고 소비됨에도 실은 그들의 인간적 양상,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재현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관찰해온바, 모든 것을 균질화하는 미디어 기술이 민중들을 과잉 노출하지만, 실상은 파시스트와 전체주의는 물론 현대 소비자 사회와 스펙타클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쇼일 뿐이다. 반면에 민중들 고유의 다양성과 특수성(몸, 몸짓, 형상, 노래, 방언 등)은 결핍 노출되고 심지어 소멸되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결핍/과잉 노출이라는 측면에서 현대 미디어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가시성 문제는 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민중들의 재현 문제에 대해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사상가들(들뢰즈, 아렌트, 아감벤, 랑시에르, 낭시 등)과 합류하면서, 미학과 정치가 공유하는 공간, 그리고 기존 질서와의 이해관계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민중들이 평범함을 넘어서 자신을 가시화하는 방식을 질문한다. 민중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이제 민중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하고, 결핍/과잉 노출의 위험에 맞서는 재현 방식을 구상하고 상상하는 것에 집중된다.
얼굴의 윤리와 미학
—다큐멘터리적 시선
로마 시대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부터 피렌체 부르주아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초상화의 역사는 얼굴의 가시성이 평범한 민중들의 경험과는 무관한 (지배 계급의) 특권의 표출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역사적인 사실에 저항해 초상화의 존엄성을 모든 인간의 얼굴로 확장시키는 다큐멘터리적 접근 방식을 개발한 것은 수많은 예술가의 작업 덕분에 가능했다. 저자가 회화나 영화를 번격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사진을 먼저 다룬 것도 이 때문이다. 사진의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지닌 미학적, 윤리적 힘, 나아가서 그 모호성까지 보여주는 필리프 바쟁의 작업이 그것이다.
장기 요양병원에서 인턴 실습을 수행하는 의과 수련의 필리프 바쟁은 임종을 앞둔,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 40여 명의 노인 얼굴을 공공연히 노출하기로 결심한다. 노인들의 얼굴은 고대 로마의 흉상에서 기를란다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티치아노에서 리처드 애버던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전적인 초상화의 역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매우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된 바쟁의 작업은 초상화 장르나 여하한 ‘예술의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바쟁의 이 <얼굴> 시리즈는 병원과 요양원이라는 제도적 공간의 차갑고 비인간화된 삶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노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킴으로써 모든 사회 계층에 가시성을 부여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사진의 전통(워커 에반스나 아우구스트 잔더, 혹은 브라사이 등)을 이어나간다. 저자는 민중을 노출하고 전시하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접근 방식에 내재된 특유의 긴장과 모순을 강조하면서 무엇보다도 독자가 또 다른 태도, 즉 시적 태도의 미학적 힘뿐만 아니라 정치적 힘을 인식하도록 고무시킨다.
저자소개
철학,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술사, 사진 및 영화 등 다양한 학제의 연구 성과를 가로질러 이미지에 관한 초학제적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몽타주의 사유 이론을 개진하는 미술사학자, 철학자일 뿐 아니라 자코메티, 시몬 앙타이, 장뤼크 고다르, 파솔리니, 하룬 파로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등의 작품을 다루는 비평적 해석가다. 니체의 계보학, 프로이트의 형상성이 디디-위베르만의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르주 바타유의 ‘도큐망’(documents),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아비 바르부르크의 ‘므네모시네’를 관통하는 시각적 사유 역시 디디-위베르만의 연구와 실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82년 히스테리 환자들의 사진에 대한 도상학적 연구서를 쓴 이후 쉰 편이 넘는 저작을 펴냈다. 예술사의 주제와 방법론에 도전하는 『이미지 앞에서』(1990), 『프라 안젤리코: 비유사성과 형상화』(1990), 『우리가 보는 것, 우리를 응시하는 것』(1992), 『잔존하는 이미지』(2002) 등을 비롯하여 역사 이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2003), 『반딧불의 잔존』(2009)을 펴낸 후 2009년에서 2016년 사이에는 ‘역사의 눈’이라 이름 붙인 여섯 권의 시리즈에서 브레히트, 하룬 파로키, 고다르, 예이젠시테인, 파솔리니 등을 다루었다.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프레누와, 팔레 드 도쿄, 주 드 폼므 등에서 《아틀라스》, 《자국》, 《장소의 우화》, 《새로운 유령들의 역사》, 《봉기》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2015년 아도르노 상을 수상했다.
책 소개
왜 다시 민중인가? 왜 민중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한가? 민중은 정말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는가? 민중이란 단어 자체가 일상 언어에서 퇴화된 지 오래인 지금, 이 ‘시대착오적’ 단어가 왜 다시 소환되어야 하고, 왜 다시 논의되어야 하는가? 디디-위베르만은 우리 시대 예술가와 역사가가 수행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민중의 존재를 ‘노출’하고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술사가이자 이미지 비평가인 그가 인류학, 사회학 혹은 정치학의 논의 대상에 더욱 적절해 보이는 민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들이 노출된다
오늘날 민중들이, 그리고 민중들의 재현이 위협받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의 이러한 생각은 이 책의 도입부 첫 번째 도판이 주는 시각적 충격과 함께 개진된다. 역사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찢겨진 익명의 참호전 희생자의 ‘깨진 얼굴’ 초상사진(25쪽 도판)은 이 책이 미술사, 역사철학, 이미지 인류학이 교차하는 사유 지대에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첫 번째 이미지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후 전개되는 다섯 개 장에 걸쳐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즉, 민중들에게 ‘대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이 절단된 얼굴 이미지에 대한 응답은 유려한 산문 텍스트로 책을 마무리하는 다섯 번째 장인 에필로그를 통해 이루어진다. 왕빙의 영화 '이름 없는 남자'에서 취한 12장의 스틸 이미지는 민중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역사에 의해 말소되고 훼손된 민중의 이미지인 첫 번째 도판과, 시적인 형상으로 민중의 존엄성을 재발견한 ‘이름 없는 남자’의 이미지 사이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텍스트를 따라 배치된다.
민중들의 시학
—이미지로 사유하기
이 책에는 민중과 관련된 총 59개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의 데생과 판화를 비롯해, 필리프 바쟁의 초상사진, 뤼미에르 형제의 기록영화, 파솔리니와 로셀리니의 픽션영화, 왕빙의 다큐멘터리 영화, 데마르티노의 사진 기록물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물론 이른바 ‘이미지 공간’ 속에서 찾아낸 인류학적 자료까지 아우른다. 일종의 ‘메타아카이브’라 할 수 있는 이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잔존의 이미지이며, 또한 각각이 이질적인 시간 속에서 생산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선형적인 역사적 서사를 전개하기 위한 예시가 아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이질적 이미지들을 『민중들의 이미지』 전반에 걸쳐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을 야기하는 몽타주 형식으로 제시한다. 이질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몽타주를 이루는 저자의 이 독특한 전개 방식은 민중의 이미지에 대한 고착된 사유 패턴 대신에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선형적인 전개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독자들이 로렌초 데메디치의 장례식 데스마스크 초상 등의 역사적인 이미지를 대면하기 전에 사진가이자 의사인 필리프 바쟁의 사진 작업 <얼굴> 시리즈가 먼저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는 데서도 입증된다. ‘얼굴’과 ‘시선’은 이 책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이다. 개인과 집단이 교차하는 지점이자 타자를 인식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민중들의 이미지도 들쭉날쭉하다. 파리 코뮌 가담자 12명의 시신이 담긴 관을 찍은 사진, 렘브란트와 고야로 대표되는 소시민들 그림, 또한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 랭보가 그리는 민중, 아비 바르부르크의 이미지 아틀라스인 므네모시네(Mnemosyne) 프로젝트도 소환된다. 그런 후에 뤼미에르 형제의 유명한 공장 출구 장면에 출현하는 민중 이미지에서 예이젠시테인과 파솔리니의 리얼리즘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나치즘의 선전 이미지와 소비에트 및 미국의 군국주의 이미지에서 재현된 민중들의 모습까지 그야말로 민중들의 (이미지) 전체 역사를 여행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냥 편안한 여행은 될 수 없다. 저자는 예술과 비예술을 포괄하는 이 들쑥날쑥한 민중들의 이미지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 이 이미지들은 어떤 선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 나아가 민중들을 구성하는 이 이미지들에 어떤 질문을 제기할 것인지를 반복적으로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디디-위베르만의 작업을 한마디로 축약한 ‘이미지로 사유하기’의 진면목이다.
민중들(의 위기)의 노출
—민중들의 노출의 역설
민중들이, 민중들의 재현이 위협받고 있다는 디디-위베르만의 문제의식은 우리 현대성의 근본적인 모순을 관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날 민중들은 정치적인 위기, 육체적인 위기와 아울러 미적인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저자는 대의민주주의의 도래 이후 현대성의 경향 중 하나가 다양한 형태로 민중이 출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출된 민중은 한편으로는 민중이 역사의 무대에 들어섰고, 그들이 정치적, 미적 재현의 공간에서 가시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중들의 노출에는 그들이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만한 일련의 위협적인 조건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의 ‘노출’이라는 말에는 눈에 보이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민중들의 노출이 축소되고 결핍된 현상은 우리가 마땅히 봐야 하는 것이 통제되고 검열 받고 박탈되는 데서 비롯된다. 반면에 민중들에 대한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는 우리 눈을 멀게 한다. 틀에 박힌 이미지로 반복되는 과잉 노출은 민중들을 비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종국에 그들을 사라지게 할 위협적 조건이다.
현대 사회에서 ‘민중’이라는 기호가 부풀리는 현상은 민중들이 끊임없이 노출되고 인용되고 소비됨에도 실은 그들의 인간적 양상,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재현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관찰해온바, 모든 것을 균질화하는 미디어 기술이 민중들을 과잉 노출하지만, 실상은 파시스트와 전체주의는 물론 현대 소비자 사회와 스펙타클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쇼일 뿐이다. 반면에 민중들 고유의 다양성과 특수성(몸, 몸짓, 형상, 노래, 방언 등)은 결핍 노출되고 심지어 소멸되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결핍/과잉 노출이라는 측면에서 현대 미디어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가시성 문제는 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민중들의 재현 문제에 대해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사상가들(들뢰즈, 아렌트, 아감벤, 랑시에르, 낭시 등)과 합류하면서, 미학과 정치가 공유하는 공간, 그리고 기존 질서와의 이해관계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민중들이 평범함을 넘어서 자신을 가시화하는 방식을 질문한다. 민중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이제 민중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하고, 결핍/과잉 노출의 위험에 맞서는 재현 방식을 구상하고 상상하는 것에 집중된다.
얼굴의 윤리와 미학
—다큐멘터리적 시선
로마 시대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부터 피렌체 부르주아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초상화의 역사는 얼굴의 가시성이 평범한 민중들의 경험과는 무관한 (지배 계급의) 특권의 표출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역사적인 사실에 저항해 초상화의 존엄성을 모든 인간의 얼굴로 확장시키는 다큐멘터리적 접근 방식을 개발한 것은 수많은 예술가의 작업 덕분에 가능했다. 저자가 회화나 영화를 번격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사진을 먼저 다룬 것도 이 때문이다. 사진의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지닌 미학적, 윤리적 힘, 나아가서 그 모호성까지 보여주는 필리프 바쟁의 작업이 그것이다.
장기 요양병원에서 인턴 실습을 수행하는 의과 수련의 필리프 바쟁은 임종을 앞둔,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 40여 명의 노인 얼굴을 공공연히 노출하기로 결심한다. 노인들의 얼굴은 고대 로마의 흉상에서 기를란다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티치아노에서 리처드 애버던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전적인 초상화의 역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매우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된 바쟁의 작업은 초상화 장르나 여하한 ‘예술의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바쟁의 이 <얼굴> 시리즈는 병원과 요양원이라는 제도적 공간의 차갑고 비인간화된 삶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노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킴으로써 모든 사회 계층에 가시성을 부여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사진의 전통(워커 에반스나 아우구스트 잔더, 혹은 브라사이 등)을 이어나간다. 저자는 민중을 노출하고 전시하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접근 방식에 내재된 특유의 긴장과 모순을 강조하면서 무엇보다도 독자가 또 다른 태도, 즉 시적 태도의 미학적 힘뿐만 아니라 정치적 힘을 인식하도록 고무시킨다.
저자소개
철학,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술사, 사진 및 영화 등 다양한 학제의 연구 성과를 가로질러 이미지에 관한 초학제적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몽타주의 사유 이론을 개진하는 미술사학자, 철학자일 뿐 아니라 자코메티, 시몬 앙타이, 장뤼크 고다르, 파솔리니, 하룬 파로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등의 작품을 다루는 비평적 해석가다. 니체의 계보학, 프로이트의 형상성이 디디-위베르만의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르주 바타유의 ‘도큐망’(documents),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아비 바르부르크의 ‘므네모시네’를 관통하는 시각적 사유 역시 디디-위베르만의 연구와 실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82년 히스테리 환자들의 사진에 대한 도상학적 연구서를 쓴 이후 쉰 편이 넘는 저작을 펴냈다. 예술사의 주제와 방법론에 도전하는 『이미지 앞에서』(1990), 『프라 안젤리코: 비유사성과 형상화』(1990), 『우리가 보는 것, 우리를 응시하는 것』(1992), 『잔존하는 이미지』(2002) 등을 비롯하여 역사 이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2003), 『반딧불의 잔존』(2009)을 펴낸 후 2009년에서 2016년 사이에는 ‘역사의 눈’이라 이름 붙인 여섯 권의 시리즈에서 브레히트, 하룬 파로키, 고다르, 예이젠시테인, 파솔리니 등을 다루었다.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프레누와, 팔레 드 도쿄, 주 드 폼므 등에서 《아틀라스》, 《자국》, 《장소의 우화》, 《새로운 유령들의 역사》, 《봉기》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2015년 아도르노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