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디자인 최빛나
크기 10.6 x 14.9cm
페이지수 246
ISBN 978-89-94027-47-0 90600
녹색 시대에 대한 기록
온갖 환경적 재앙과 디스토피아적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역설적으로 우리는 과잉된 ‘자연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의 온갖 파생 상품들은 만연하고 모든 것이 쾌적하게 오염되어 있다. 선한 의지와 이상에서 비롯된 것들 역시 현실에서는 가장 기묘한 부정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훌륭한 녹색의 교리도 다채로운 도착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만연한 포르노그라피로 취급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만 취급할 수 있을까.
(2012년의 노트에서)
일반 자연을 위한 매뉴얼
프롤로그 : 녹색 시대에 대한 기록
리버사이드 라이딩
뉴 - 엔지니어링
풍경과 오락
녹색의 왕
사회적 자연
사이언스 픽션
센트럴 파크
기념비가 된 것들
전원도시의 꿈
녹도 & 근린기계
스크램블 도시의 노른자위
농성정원
엣 더 파크
에필로그 : 대방랑 : 4대강을 위한 사적 대화
슬레이트 지붕, 나무와 짚, 철로 이루어진 60-70년 된 건물들이 늙은 향을 풍기며 기우뚱하게 서 있는 동네에서 이 책을 만들고 있다. 대형 공장이 급속하게 도시로 노동력을 빨아들이던 초기 산업 사회의 생태계와 아파트 - 마트 - 근린공원으로 이어지는 근래의 전형적 도시 생태계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종 격투를 벌이듯 존재하는 곳이다. 이어짐에 대한 감각이 생태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멸종되어 가는 이 준 공업 시설들은 원자연 보다 내 존재에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노출되어 흩어져가는 회색가루와 녹슬어 가는 철근이 노스텔지어가 되는 것은 콘크리트에서 탯줄이 시작된 세대에겐 당연한 귀착일지 모른다.
이 책은 이 시대에 온갖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하는 ‘자연’에 대한 개인적 기록을 묶은 것이다. 2010년 10여명의 작업자와 함께 한 4대강 대방랑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 기록은 온갖 생태와 조경에 대한 논리, 알리바이에 대한 통찰을 담은 글들과, 채집하고 다닌 도시 자연과 공원 이미지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알아갈수록 갈피를 잡기는커녕 안다는 것이 뭔지 그저 무지의 깊이만 깊어져 갔다. 어쩔 때는 이 연기성(緣起性) 없이 이식된 자연들이 배꼽 없는 ‘포스트 휴먼’을 위한 초기 버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에도 빠졌다. 그러다 지속적으로 끼적여 온 작업들, 기록한 사진들이 어느 수위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어느 순간 몇 가지 맥락들을 안에서 만들어 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 사이에서 부분적이지만 내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자연상이라는 것들을 직조해 볼 수 있었다.
온갖 자연 컨텐츠로 꾸며진 도시는 빈곤한 풍부함을 담고 있었고 이러한 파생성은 포르노적이었고 도착적이었으며 키취적인 매력이 넘쳤다. 적당히 오염되고 안락한 풍경을 보면 도시에서 자연은 (버려져서) 비루해 질 것인가 인공화 될 것인가 도착화 될 것인가 혹은 유능해 질 것인가라는 선택지 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풍경을 보며 조소하는 나는 이것이 키취적 문화성을 넘어서지 못한, 세련됨을 취득하지 못한 것을 조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졌다. 그것은 촌스러운 녹화사업과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나는 생태예술 사이에서 무언가를 놓쳐버린 느낌과도 같았다. 아니면 비판할 것, 풍자할 것, 어디에 손을 대던 얻어 걸리는 것 많은 이 곳에서 또 하나의 헛된 비판적 행동주의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이 되었다.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와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환경주의와 목가적 이념은 세계적인 도시화 상황과 맞지 않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갈파하거나 ‘자연정화 시스템이 현대적 기술로 운영되는 정화시설 보다 더 효율적으로 오염과 쓰레기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면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그 생각의 토대는 공유할 수 없는, 그러면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 물론 4대강 사업을 이런 질문 위에 걸쳐 놓을 수는 없다.
질문은 ‘새로운 생태/사회적 상상을 구축해 본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로 옮겨갔다. 아니 사실 상상은 이미 다양하게 나와있었다. 하지만 4대강 돌며 처음으로 촉각적으로 지각한 것들은 그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강이란 것 자체를 처음으로 사유하게 했던그 촉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 꼭지만 틀면 나오는 수돗물이 강에서 온다는 것을 자각이나 하고 있었던가. 핑계를 대자면 기껏 아리수를 통해 수돗물의 명품화를 추진하는 것이 사회적 프로그램인 곳에서 그런 지각은 언감생심인지도 모르겠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스스로의 무지를 통탄할 또 다른 한 예일 뿐이었다. 온갖 개발의 알리바이에 대한 욕을 해대기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었고 살아가고 있는 조건에 대한 보다 폭넓은 통찰을 얻고 싶었다.
후기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기술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국가에서 (또한 여전한 냉전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4대강 사업과 2000년대 이후의 사회간접자본으로의 자연은 온갖 근대와 탈근대, 전근대의 모습이 뒤섞여 있다.
확실한 것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이제 도시에서의 자연은 사회적 프로그램과 생태적 프로그램, 개발의 프로그램이 구별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4대강 사업 이후로는 도시를 벗어나 전 지역적 프로그램이 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반 자연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생태적 프로그램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이 프로그램들이 인간의 조건으로써의 자연, 공유지적 공간으로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 의제 보다는 지대의 상승과 그 실현을 위한 녹색 배경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는 곳곳에 눈에 띄었다.
오히려 여전히 경제를 위한 원자원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넘어 이제는 부가 상품으로 거는 기대,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온갖 정치적 문화적 갈등의 지형도를 예민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좌표에 더 가까웠다. 혹은 새로운 지식 경제 역군들이 몰려올 생태적 쾌적함을 위한 프로그램 - 창조 도시를 위한 장치적 재료로 접근이 되고 있다. 여러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빗대자면 ‘생태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샤먼이 쫓겨난 자리에 ‘에코이즘’이란 물신이 들어차고 그것이 구원의 교리를 설파하던지 또 다른 성장의 교리를 설파하던 모두 한통속으로 보였다.
애초 생태적 지속성을 염두에 두었을 ‘지속 가능한 개발’ 이라는 담론은 쇠락에 직면한 개발이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드러내는 과장 광고 같았고, 또한 녹색 비지니스를 통한 좋은 시장을 발견한 토건업의 자기 개발적 강박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황금광의 시대는 가고 녹색광의 시대가 여기저기를 비추었다.
청계천의 기묘함을 우리는 이제 알아채지 못한다. 생태체험과 여가, 수위 조절과 같이 복잡한 도시에 맞춰 복합적으로 기능하니 이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의 가능성은 동일한 논리가 작용하는 4대강 사업으로까지 이해의 폭을 넓힌다. 이런 면에서 청계천은 4대강 사업을 위한 원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4대강 마다 존재하는 유능한 자연의 과시적 경관으로의 귀결이다. 그리고 도시라는 야만성이 자연이라는 야수성을 압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연의 과잉된 살덩이들이 이제는 우리의 정신과 감응하는 살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생태나 환경, 공간정의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존재 전체를 도시화 그리고 기술과 더불어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어느 정도는 담고 있다. 자연을 어떻게 자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은 앞으로 인간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자연화라는 기술은 구체적 정치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어쨌든 의심과 난감함 -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터전임을 인정하는 마음과 녹색 알리바이로 치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 녹색 시대, 자연주의 시대를 기록했다. 뭐든 인간이 수많은 대상들 속에 존재하는 한 연결점이라는 인식에 기반해 진보를 성취할 길은 요원해 보인다.
녹색 시대에 대한 기록
온갖 환경적 재앙과 디스토피아적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역설적으로 우리는 과잉된 ‘자연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의 온갖 파생 상품들은 만연하고 모든 것이 쾌적하게 오염되어 있다. 선한 의지와 이상에서 비롯된 것들 역시 현실에서는 가장 기묘한 부정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훌륭한 녹색의 교리도 다채로운 도착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만연한 포르노그라피로 취급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만 취급할 수 있을까.
(2012년의 노트에서)
일반 자연을 위한 매뉴얼
프롤로그 : 녹색 시대에 대한 기록
리버사이드 라이딩
뉴 - 엔지니어링
풍경과 오락
녹색의 왕
사회적 자연
사이언스 픽션
센트럴 파크
기념비가 된 것들
전원도시의 꿈
녹도 & 근린기계
스크램블 도시의 노른자위
농성정원
엣 더 파크
에필로그 : 대방랑 : 4대강을 위한 사적 대화
슬레이트 지붕, 나무와 짚, 철로 이루어진 60-70년 된 건물들이 늙은 향을 풍기며 기우뚱하게 서 있는 동네에서 이 책을 만들고 있다. 대형 공장이 급속하게 도시로 노동력을 빨아들이던 초기 산업 사회의 생태계와 아파트 - 마트 - 근린공원으로 이어지는 근래의 전형적 도시 생태계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종 격투를 벌이듯 존재하는 곳이다. 이어짐에 대한 감각이 생태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멸종되어 가는 이 준 공업 시설들은 원자연 보다 내 존재에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노출되어 흩어져가는 회색가루와 녹슬어 가는 철근이 노스텔지어가 되는 것은 콘크리트에서 탯줄이 시작된 세대에겐 당연한 귀착일지 모른다.
이 책은 이 시대에 온갖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하는 ‘자연’에 대한 개인적 기록을 묶은 것이다. 2010년 10여명의 작업자와 함께 한 4대강 대방랑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 기록은 온갖 생태와 조경에 대한 논리, 알리바이에 대한 통찰을 담은 글들과, 채집하고 다닌 도시 자연과 공원 이미지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알아갈수록 갈피를 잡기는커녕 안다는 것이 뭔지 그저 무지의 깊이만 깊어져 갔다. 어쩔 때는 이 연기성(緣起性) 없이 이식된 자연들이 배꼽 없는 ‘포스트 휴먼’을 위한 초기 버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에도 빠졌다. 그러다 지속적으로 끼적여 온 작업들, 기록한 사진들이 어느 수위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어느 순간 몇 가지 맥락들을 안에서 만들어 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 사이에서 부분적이지만 내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자연상이라는 것들을 직조해 볼 수 있었다.
온갖 자연 컨텐츠로 꾸며진 도시는 빈곤한 풍부함을 담고 있었고 이러한 파생성은 포르노적이었고 도착적이었으며 키취적인 매력이 넘쳤다. 적당히 오염되고 안락한 풍경을 보면 도시에서 자연은 (버려져서) 비루해 질 것인가 인공화 될 것인가 도착화 될 것인가 혹은 유능해 질 것인가라는 선택지 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풍경을 보며 조소하는 나는 이것이 키취적 문화성을 넘어서지 못한, 세련됨을 취득하지 못한 것을 조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졌다. 그것은 촌스러운 녹화사업과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나는 생태예술 사이에서 무언가를 놓쳐버린 느낌과도 같았다. 아니면 비판할 것, 풍자할 것, 어디에 손을 대던 얻어 걸리는 것 많은 이 곳에서 또 하나의 헛된 비판적 행동주의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이 되었다.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와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환경주의와 목가적 이념은 세계적인 도시화 상황과 맞지 않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갈파하거나 ‘자연정화 시스템이 현대적 기술로 운영되는 정화시설 보다 더 효율적으로 오염과 쓰레기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면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그 생각의 토대는 공유할 수 없는, 그러면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 물론 4대강 사업을 이런 질문 위에 걸쳐 놓을 수는 없다.
질문은 ‘새로운 생태/사회적 상상을 구축해 본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로 옮겨갔다. 아니 사실 상상은 이미 다양하게 나와있었다. 하지만 4대강 돌며 처음으로 촉각적으로 지각한 것들은 그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강이란 것 자체를 처음으로 사유하게 했던그 촉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 꼭지만 틀면 나오는 수돗물이 강에서 온다는 것을 자각이나 하고 있었던가. 핑계를 대자면 기껏 아리수를 통해 수돗물의 명품화를 추진하는 것이 사회적 프로그램인 곳에서 그런 지각은 언감생심인지도 모르겠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스스로의 무지를 통탄할 또 다른 한 예일 뿐이었다. 온갖 개발의 알리바이에 대한 욕을 해대기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었고 살아가고 있는 조건에 대한 보다 폭넓은 통찰을 얻고 싶었다.
후기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기술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국가에서 (또한 여전한 냉전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4대강 사업과 2000년대 이후의 사회간접자본으로의 자연은 온갖 근대와 탈근대, 전근대의 모습이 뒤섞여 있다.
확실한 것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이제 도시에서의 자연은 사회적 프로그램과 생태적 프로그램, 개발의 프로그램이 구별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4대강 사업 이후로는 도시를 벗어나 전 지역적 프로그램이 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반 자연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생태적 프로그램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이 프로그램들이 인간의 조건으로써의 자연, 공유지적 공간으로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 의제 보다는 지대의 상승과 그 실현을 위한 녹색 배경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는 곳곳에 눈에 띄었다.
오히려 여전히 경제를 위한 원자원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넘어 이제는 부가 상품으로 거는 기대,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온갖 정치적 문화적 갈등의 지형도를 예민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좌표에 더 가까웠다. 혹은 새로운 지식 경제 역군들이 몰려올 생태적 쾌적함을 위한 프로그램 - 창조 도시를 위한 장치적 재료로 접근이 되고 있다. 여러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빗대자면 ‘생태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샤먼이 쫓겨난 자리에 ‘에코이즘’이란 물신이 들어차고 그것이 구원의 교리를 설파하던지 또 다른 성장의 교리를 설파하던 모두 한통속으로 보였다.
애초 생태적 지속성을 염두에 두었을 ‘지속 가능한 개발’ 이라는 담론은 쇠락에 직면한 개발이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드러내는 과장 광고 같았고, 또한 녹색 비지니스를 통한 좋은 시장을 발견한 토건업의 자기 개발적 강박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황금광의 시대는 가고 녹색광의 시대가 여기저기를 비추었다.
청계천의 기묘함을 우리는 이제 알아채지 못한다. 생태체험과 여가, 수위 조절과 같이 복잡한 도시에 맞춰 복합적으로 기능하니 이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의 가능성은 동일한 논리가 작용하는 4대강 사업으로까지 이해의 폭을 넓힌다. 이런 면에서 청계천은 4대강 사업을 위한 원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4대강 마다 존재하는 유능한 자연의 과시적 경관으로의 귀결이다. 그리고 도시라는 야만성이 자연이라는 야수성을 압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연의 과잉된 살덩이들이 이제는 우리의 정신과 감응하는 살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생태나 환경, 공간정의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존재 전체를 도시화 그리고 기술과 더불어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어느 정도는 담고 있다. 자연을 어떻게 자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은 앞으로 인간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자연화라는 기술은 구체적 정치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어쨌든 의심과 난감함 -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터전임을 인정하는 마음과 녹색 알리바이로 치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 녹색 시대, 자연주의 시대를 기록했다. 뭐든 인간이 수많은 대상들 속에 존재하는 한 연결점이라는 인식에 기반해 진보를 성취할 길은 요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