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지은이),
안준범 (옮긴이)
리시올 발행
2022-04-05
224쪽
128*200mm
ISBN : 9791190292146
스피박은 어떻게 읽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읽어야 하는가
“문학적 읽기를 위한 상상력 훈련이 유연한 에피스테몰로지를
생산한다는 점, 바로 이 에피스테몰로지가,
아마도, 우리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가야트리 차르크라보르티 스피박,
나흘간의 교육 무대에서 상상력 훈련으로서의 읽기를 가르치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1976년 서른네 살의 나이에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영어로 번역하고 장문의 해제를 덧붙여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뒤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 「잘못을 바로잡기」(2004) 등의 작업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탈구축하는 포스트식민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 세계 인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 중 하나인 그의 작업은 한국에도 다수가 소개되어 ‘서발턴’과 ‘포스트식민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새겨 넣었지만, 이들 개념이 너무나 강한 그림자를 드리운 탓에 그가 언제나 읽기의 책임을 요청하는 문학 비평가이자 교사로 쓰고 활동해 왔다는 사실은 제대로 환기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을 걷어 내고 읽어 보면 그의 작업 중심에는 읽기와 듣기의 문제가, 서발턴의 교육이라는 문제가 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나아가 스피박 자신이 “과거의 과부 화장에서 현재의 일이자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한 아동 정신 변화로”(210) 관심이 옮겨 왔다고 말하듯 읽기(와) 교육은 점점 더 그를 사로잡아 왔다. 그렇다면 스피박은 어떻게 읽으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읽기』의 질문이자 이 책에서 스피박이 실연實演하고자 하는 쟁점이다.
『읽기』는 스피박이 2012년 5월에 인도의 푸네 대학에서 진행한 나흘간의 강연을 엮은 책이다. 역사학 연구자로서 현대 철학의 전회들을 통해 역사학을 다르게 실천할 가능성을 궁리해 온 안준범이 번역한 이 책에서 스피박은 오랫동안 거듭 강조해 온 ‘읽기’의 중요성을 인도의 영문학도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번 역설한다. 그리고 그 정신에 입각해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J. M. 쿳시의 『서머타임』,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 읽기를, 그리고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 다시 읽기를 실행한다.
사회 정의의 원천으로서의 읽기,
세부에 주목함으로써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기
스피박은 인문학의 요체가 ‘욕망들의 비강제적 재배치’임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왔다. 우리의 욕망이 민족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성 차별적인 승리들보다는 계급, 인종, 젠더 평등을 향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재배치를 위한 교육을 그는 ‘상상력 훈련’이라 부른다. 이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학생과 독자가 텍스트의 세부에 주목해 텍스트 안에 흔적으로 남은 타자의 목소리를 살피게 만듦으로써. 그가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들에서 배운 ‘탈구축’deconstruction이란 해체하고 파괴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 같은 면밀히 읽기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읽기의 근원적인 목표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정신의 습속 변화며, 비교 문학자인 스피박에게 이를 위한 최상의 무기는 여전히 문학 교육, 특히 영문학 연구 전통이다. 무언가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음을 언제나 유념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정교하게 발전한 제도적 문학 연구를 폐기하기보다는 ‘긍정적 사보타주’를 통해 그것의 성과를 움켜쥐고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건 한가한 요청 아닌가? 세상이 불의로 가득 차 있으니 세심한 읽기보다는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직접적이고 긴급한 사안이 줄지어 있을 때 읽기에 전념하기란 거의 불가능함을 그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읽기 교육을 통한 상상력 훈련이 꾸준히 선행되지 않는다면 사회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을지언정 유지될 수는 없다는 것이 스피박의 오랜 지론이다. “세부를 향한 이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혁명도 지속되거나 고양될 수 없지요”(22). 그의 말마따나 사회적 약자들 혹은 서발턴이 헤게모니의 회로에 진입했을 때 또 다른 억압자로 돌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상상력 훈련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스피박은 장기적인 준비를 요청한다. 지식인의 재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처럼 상상력을 훈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것이 문학도와 문학 교사의 임무라고 제언한다. 서발턴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 그는 실제로 인도 농촌 지역에 학교들을 설립해 비문해자 성인과 아동을 교육하는 프로젝트를 수십 년째 진행 중이기도 하다. 직접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자들을 생산하려는’ 욕망을 품고서 미국과 인도, 즉 각각 글로벌 북부와 남부의 한 거점인 이곳들에서 비대칭적으로 교육 실천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인문학이 점점 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더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 훈련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러한 교육 실천이 더디고 당장은 효과도 미미해 보이겠지만 궁극에는 더 많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내내 제가 강조했던 것은, 문학적 읽기를 위한 상상력 훈련이 유연한 에피스테몰로지를 생산한다는 점, 바로 이 에피스테몰로지가, 아마도, 우리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입니다”(44).
문학은 증거가 아니다
텍스트가 펼쳐 내는 욕망을 따라가는 읽기
이렇게 읽기와 교육의 가치를 역설한 다음 스피박은 본문에서 실제 읽기를 행한다. 「헤겔을 읽는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프란츠 파농이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삼는지’를 밝힌다. 헤겔 자신이 주인-노예 변증법을 개인적이거나 심리적인 사례로 읽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파농은 이 변증법을 사용해 마르티니크인들의 심리적 환경을 설명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이것이 오독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스피박이 보기에 “파농은 헤겔을 읽는 것이지, 단순히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52)며, 이것이야말로 파농이 헤겔을 “가장 관여적인 방식으로 읽었다는 증거”(57)다.
다음 장인 「스피박 다시 읽기」에서는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를 검토하면서 이 글들이 나온 배경과 더불어 저자인 과거 자신의 ‘검토되지 않은 문화적 가정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이 “요컨대 그들은 틀렸고 우리가 옳으며, (비록 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 말할 만큼은 조심스러웠지만) 샬럿 브론테는 인종주의자라는 식”(99)으로 읽혀 온 것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 것에 유감을 표명하며, 「잘못을 바로잡기」와 관련해서는 “바깥의 부름이 있다는, 그러므로 인간 존재들은 타자의 부름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 관념이, 이제 제게는, 너무 감상적인 걸로 보”(129)인다고 말하면서 “권리와 책임이 ‘도래하다’라는 영속적 양식으로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믿지 않아요. 이제는 이것이 교육 철학을 통해 하나의 정신 집합으로서 에피스테몰로지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고 믿지요”(130)라는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텍스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서는 J. M. 쿳시의 기이한 자전적 소설 『서머타임』을 읽으면서 수사학 자원들을 두드러지게 활용하는 이 텍스트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간접 자유 화법’을 사용해 쿳시는 백인 남성 크레올이 말할 권리가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이런 수사학적 신호들을 따라가면서 스피박은 쿳시의 텍스트적 질문과 욕망에 주목하고, 허위로 가득한 이 자전적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진실함이 구축되는지를 확인한다.
이런 읽기들을 감행한 교육 무대에서 스피박은 “세심”하고 “겸허”하게 읽으라고, “아주 고지식하게 문자 그대로” 읽으라고 학생과 독자에게 청한다. 이는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텍스트에 설정된 사적인 문법을 살펴본다는” 뜻이다(204). 그가 강조하길 하나의 텍스트는 사회 현실의 증거도 이론을 적용할 대상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작가라는 “의도하는 주체에게서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어야”(188) 할 뿐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197)이라는 유혹에도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철학적인 읽기와 문학적인 읽기 등등을 구분하는 것 역시 쓸데없는 짓이다. 그에겐 “그냥 읽기가 있는 것”(206)일 따름이다. “우리는 텍스트가 읽히길 원하는 대로 겸허하게 읽어 들어가요. 그러면 서서히 텍스트가 돌아서기 시작하지요. 우리가 충분히 잘 배웠다면요”(63). 이 읽기란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들어가는 실천, 즉 세부에 주목함으로써 텍스트의 질문을 확인하고 텍스트가 펼쳐 내는 욕망을 따라가는 실천이다. 그가 “비평적 내밀함”이라 부르는 이것을 확립할 때 독자인 우리는 “오히려 텍스트를 굴리고 사용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해 목전의 기획을 위해 텍스트에 담긴 최상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찾아내”게 된다(206).
스피박을 다시 읽기 위해
스피박은 오드리 로드의 말을 비틀어 ‘주인의 도구를 사용해 주인의 집을 무너뜨리기’를 말한 바 있다. 주인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과제를 회피하겠다는 핑계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박의 제안은 지적질에 그치는 대신 차라리 이 도구들 즉 주로 서구 남성들이 정교화해 온 이론들과 공모하면서 이 이론을 서발턴을 위해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는 주인의 텍스트와 노예의 텍스트 모두를 세심하게 살펴야만 가능한 일, 언제나 타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이를 포함한 여러 이유 때문에 스피박 읽기는 어렵다. 그리고 『읽기』는 이 어려움을 경감해 주지 않는다. 입문격의 설명을 제공하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원칙에 입각해 그다운 읽기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피박의 글에는 날카로운 직관에서 비롯하는 섬광 같은 강렬함이 가득하며 『읽기』 곳곳에서도 이 매력이 빛을 발한다. 나아가 “변명도 말고 비난도 마세요. 입구를 확보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문학적 훈련을 통해 상상력을 사용”하라고 권하는 일흔 살 된 이 대가의 어조는 읽기가 사소해지고 있는 오늘날 특별히 감동적인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스피박의 쓰기는 우리에게 많은 해독 노력을 요하지만, 『읽기』는 강의라는 형식 덕분에, 또 질의 응답을 통해, 마지막으로 그의 섬세한 읽기 그 자체로 인해 그가 견지하는 읽기와 교육에 대한 관점을 한층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또 이 작은 책은 그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개념과 모티프, 사례 상당수를 촘촘하게 담고 있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의 「문학」 장에서 샬럿 브론테와 마하스웨타 데비, J. M. 쿳시를 다루었음을 감안하면 이 책이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의 다시 쓰기라고 볼 수도 있으며, 후기 저작인 『다른 여러 아시아』와 『지구화 시대의 미학 교육』을 이 책이 압축해 되풀이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다. 요컨대 『읽기』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읽기들을 돌아보고 우리의 읽기를 위해 그의 읽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최상의 도구다.
목차
감사의 말
편집자 노트
서문 _라라 초크세이
서론
헤겔을 읽는 파농
스피박 다시 읽기
텍스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J. M. 쿳시의 『서머타임』과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
교직과 자서전
마무리
참고 문헌
지은이 소개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Gayatri Chakravorty Spivak) (지은이)
1942년 인도 서벵골주 콜카타에서 태어났다. 1959년 콜카타 대학의 프레지던시 칼리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주해 1967년 코넬 대학에서 폴 드 만의 지도하에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6년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영어 번역과 해제로 주목받았으며, 이어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과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 등을 필두로 한 적극적인 지적 개입 및 서발턴 연구 집단(Subaltern Studies Group) 소개 활동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탈구축하는 포스트식민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수의 논문과 인터뷰를 발표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다른 세상에서』(1987), 『스피박의 대담』(1990), 『교육 기계 안의 바깥에서』(1993),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 『다른 여러 아시아』(2008), 『지구화 시대의 미학 교육』(2012) 등의 저서로 묶여 출간되었다. 또 벵골 소설가이자 활동가인 마하스웨타 데비의 여러 작품과 마르티니크 작가이자 정치인인 에메 세제르의 『콩고에서의 한 계절』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번역에 관한 글을 엮은 『살아 있는 번역』을 펴냈다.
아이오와 대학과 시카고 대학, 텍사스 대학, 피츠버그 대학 등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 비교 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1980년대 중반 이래 인도 농촌 지역에 학교들을 설립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비문해 성인과 아동을 교육하고 있다.
2012년에 교토 사유와 윤리상(Kyoto Prize in Thought and Ethics)을 수상했고 2013년에는 인도 정부의 시민 훈장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을 수여받았다. 현재 W. E. B. 두 보이스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
스피박은 어떻게 읽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읽어야 하는가
“문학적 읽기를 위한 상상력 훈련이 유연한 에피스테몰로지를
생산한다는 점, 바로 이 에피스테몰로지가,
아마도, 우리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가야트리 차르크라보르티 스피박,
나흘간의 교육 무대에서 상상력 훈련으로서의 읽기를 가르치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1976년 서른네 살의 나이에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영어로 번역하고 장문의 해제를 덧붙여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뒤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 「잘못을 바로잡기」(2004) 등의 작업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탈구축하는 포스트식민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 세계 인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 중 하나인 그의 작업은 한국에도 다수가 소개되어 ‘서발턴’과 ‘포스트식민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새겨 넣었지만, 이들 개념이 너무나 강한 그림자를 드리운 탓에 그가 언제나 읽기의 책임을 요청하는 문학 비평가이자 교사로 쓰고 활동해 왔다는 사실은 제대로 환기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을 걷어 내고 읽어 보면 그의 작업 중심에는 읽기와 듣기의 문제가, 서발턴의 교육이라는 문제가 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나아가 스피박 자신이 “과거의 과부 화장에서 현재의 일이자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한 아동 정신 변화로”(210) 관심이 옮겨 왔다고 말하듯 읽기(와) 교육은 점점 더 그를 사로잡아 왔다. 그렇다면 스피박은 어떻게 읽으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읽기』의 질문이자 이 책에서 스피박이 실연實演하고자 하는 쟁점이다.
『읽기』는 스피박이 2012년 5월에 인도의 푸네 대학에서 진행한 나흘간의 강연을 엮은 책이다. 역사학 연구자로서 현대 철학의 전회들을 통해 역사학을 다르게 실천할 가능성을 궁리해 온 안준범이 번역한 이 책에서 스피박은 오랫동안 거듭 강조해 온 ‘읽기’의 중요성을 인도의 영문학도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번 역설한다. 그리고 그 정신에 입각해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J. M. 쿳시의 『서머타임』,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 읽기를, 그리고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 다시 읽기를 실행한다.
사회 정의의 원천으로서의 읽기,
세부에 주목함으로써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기
스피박은 인문학의 요체가 ‘욕망들의 비강제적 재배치’임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왔다. 우리의 욕망이 민족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성 차별적인 승리들보다는 계급, 인종, 젠더 평등을 향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재배치를 위한 교육을 그는 ‘상상력 훈련’이라 부른다. 이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학생과 독자가 텍스트의 세부에 주목해 텍스트 안에 흔적으로 남은 타자의 목소리를 살피게 만듦으로써. 그가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들에서 배운 ‘탈구축’deconstruction이란 해체하고 파괴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 같은 면밀히 읽기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읽기의 근원적인 목표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정신의 습속 변화며, 비교 문학자인 스피박에게 이를 위한 최상의 무기는 여전히 문학 교육, 특히 영문학 연구 전통이다. 무언가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음을 언제나 유념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정교하게 발전한 제도적 문학 연구를 폐기하기보다는 ‘긍정적 사보타주’를 통해 그것의 성과를 움켜쥐고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건 한가한 요청 아닌가? 세상이 불의로 가득 차 있으니 세심한 읽기보다는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직접적이고 긴급한 사안이 줄지어 있을 때 읽기에 전념하기란 거의 불가능함을 그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읽기 교육을 통한 상상력 훈련이 꾸준히 선행되지 않는다면 사회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을지언정 유지될 수는 없다는 것이 스피박의 오랜 지론이다. “세부를 향한 이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혁명도 지속되거나 고양될 수 없지요”(22). 그의 말마따나 사회적 약자들 혹은 서발턴이 헤게모니의 회로에 진입했을 때 또 다른 억압자로 돌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상상력 훈련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스피박은 장기적인 준비를 요청한다. 지식인의 재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처럼 상상력을 훈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것이 문학도와 문학 교사의 임무라고 제언한다. 서발턴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 그는 실제로 인도 농촌 지역에 학교들을 설립해 비문해자 성인과 아동을 교육하는 프로젝트를 수십 년째 진행 중이기도 하다. 직접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자들을 생산하려는’ 욕망을 품고서 미국과 인도, 즉 각각 글로벌 북부와 남부의 한 거점인 이곳들에서 비대칭적으로 교육 실천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인문학이 점점 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더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 훈련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러한 교육 실천이 더디고 당장은 효과도 미미해 보이겠지만 궁극에는 더 많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내내 제가 강조했던 것은, 문학적 읽기를 위한 상상력 훈련이 유연한 에피스테몰로지를 생산한다는 점, 바로 이 에피스테몰로지가, 아마도, 우리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입니다”(44).
문학은 증거가 아니다
텍스트가 펼쳐 내는 욕망을 따라가는 읽기
이렇게 읽기와 교육의 가치를 역설한 다음 스피박은 본문에서 실제 읽기를 행한다. 「헤겔을 읽는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프란츠 파농이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삼는지’를 밝힌다. 헤겔 자신이 주인-노예 변증법을 개인적이거나 심리적인 사례로 읽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파농은 이 변증법을 사용해 마르티니크인들의 심리적 환경을 설명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이것이 오독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스피박이 보기에 “파농은 헤겔을 읽는 것이지, 단순히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52)며, 이것이야말로 파농이 헤겔을 “가장 관여적인 방식으로 읽었다는 증거”(57)다.
다음 장인 「스피박 다시 읽기」에서는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를 검토하면서 이 글들이 나온 배경과 더불어 저자인 과거 자신의 ‘검토되지 않은 문화적 가정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이 “요컨대 그들은 틀렸고 우리가 옳으며, (비록 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 말할 만큼은 조심스러웠지만) 샬럿 브론테는 인종주의자라는 식”(99)으로 읽혀 온 것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 것에 유감을 표명하며, 「잘못을 바로잡기」와 관련해서는 “바깥의 부름이 있다는, 그러므로 인간 존재들은 타자의 부름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 관념이, 이제 제게는, 너무 감상적인 걸로 보”(129)인다고 말하면서 “권리와 책임이 ‘도래하다’라는 영속적 양식으로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믿지 않아요. 이제는 이것이 교육 철학을 통해 하나의 정신 집합으로서 에피스테몰로지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고 믿지요”(130)라는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텍스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서는 J. M. 쿳시의 기이한 자전적 소설 『서머타임』을 읽으면서 수사학 자원들을 두드러지게 활용하는 이 텍스트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간접 자유 화법’을 사용해 쿳시는 백인 남성 크레올이 말할 권리가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이런 수사학적 신호들을 따라가면서 스피박은 쿳시의 텍스트적 질문과 욕망에 주목하고, 허위로 가득한 이 자전적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진실함이 구축되는지를 확인한다.
이런 읽기들을 감행한 교육 무대에서 스피박은 “세심”하고 “겸허”하게 읽으라고, “아주 고지식하게 문자 그대로” 읽으라고 학생과 독자에게 청한다. 이는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텍스트에 설정된 사적인 문법을 살펴본다는” 뜻이다(204). 그가 강조하길 하나의 텍스트는 사회 현실의 증거도 이론을 적용할 대상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작가라는 “의도하는 주체에게서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어야”(188) 할 뿐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197)이라는 유혹에도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철학적인 읽기와 문학적인 읽기 등등을 구분하는 것 역시 쓸데없는 짓이다. 그에겐 “그냥 읽기가 있는 것”(206)일 따름이다. “우리는 텍스트가 읽히길 원하는 대로 겸허하게 읽어 들어가요. 그러면 서서히 텍스트가 돌아서기 시작하지요. 우리가 충분히 잘 배웠다면요”(63). 이 읽기란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들어가는 실천, 즉 세부에 주목함으로써 텍스트의 질문을 확인하고 텍스트가 펼쳐 내는 욕망을 따라가는 실천이다. 그가 “비평적 내밀함”이라 부르는 이것을 확립할 때 독자인 우리는 “오히려 텍스트를 굴리고 사용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해 목전의 기획을 위해 텍스트에 담긴 최상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찾아내”게 된다(206).
스피박을 다시 읽기 위해
스피박은 오드리 로드의 말을 비틀어 ‘주인의 도구를 사용해 주인의 집을 무너뜨리기’를 말한 바 있다. 주인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과제를 회피하겠다는 핑계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박의 제안은 지적질에 그치는 대신 차라리 이 도구들 즉 주로 서구 남성들이 정교화해 온 이론들과 공모하면서 이 이론을 서발턴을 위해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는 주인의 텍스트와 노예의 텍스트 모두를 세심하게 살펴야만 가능한 일, 언제나 타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이를 포함한 여러 이유 때문에 스피박 읽기는 어렵다. 그리고 『읽기』는 이 어려움을 경감해 주지 않는다. 입문격의 설명을 제공하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원칙에 입각해 그다운 읽기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피박의 글에는 날카로운 직관에서 비롯하는 섬광 같은 강렬함이 가득하며 『읽기』 곳곳에서도 이 매력이 빛을 발한다. 나아가 “변명도 말고 비난도 마세요. 입구를 확보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문학적 훈련을 통해 상상력을 사용”하라고 권하는 일흔 살 된 이 대가의 어조는 읽기가 사소해지고 있는 오늘날 특별히 감동적인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스피박의 쓰기는 우리에게 많은 해독 노력을 요하지만, 『읽기』는 강의라는 형식 덕분에, 또 질의 응답을 통해, 마지막으로 그의 섬세한 읽기 그 자체로 인해 그가 견지하는 읽기와 교육에 대한 관점을 한층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또 이 작은 책은 그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개념과 모티프, 사례 상당수를 촘촘하게 담고 있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의 「문학」 장에서 샬럿 브론테와 마하스웨타 데비, J. M. 쿳시를 다루었음을 감안하면 이 책이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의 다시 쓰기라고 볼 수도 있으며, 후기 저작인 『다른 여러 아시아』와 『지구화 시대의 미학 교육』을 이 책이 압축해 되풀이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다. 요컨대 『읽기』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읽기들을 돌아보고 우리의 읽기를 위해 그의 읽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최상의 도구다.
목차
감사의 말
편집자 노트
서문 _라라 초크세이
서론
헤겔을 읽는 파농
스피박 다시 읽기
텍스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J. M. 쿳시의 『서머타임』과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
교직과 자서전
마무리
참고 문헌
지은이 소개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Gayatri Chakravorty Spivak) (지은이)
1942년 인도 서벵골주 콜카타에서 태어났다. 1959년 콜카타 대학의 프레지던시 칼리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주해 1967년 코넬 대학에서 폴 드 만의 지도하에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6년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영어 번역과 해제로 주목받았으며, 이어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과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 등을 필두로 한 적극적인 지적 개입 및 서발턴 연구 집단(Subaltern Studies Group) 소개 활동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탈구축하는 포스트식민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수의 논문과 인터뷰를 발표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다른 세상에서』(1987), 『스피박의 대담』(1990), 『교육 기계 안의 바깥에서』(1993),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 『다른 여러 아시아』(2008), 『지구화 시대의 미학 교육』(2012) 등의 저서로 묶여 출간되었다. 또 벵골 소설가이자 활동가인 마하스웨타 데비의 여러 작품과 마르티니크 작가이자 정치인인 에메 세제르의 『콩고에서의 한 계절』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번역에 관한 글을 엮은 『살아 있는 번역』을 펴냈다.
아이오와 대학과 시카고 대학, 텍사스 대학, 피츠버그 대학 등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 비교 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1980년대 중반 이래 인도 농촌 지역에 학교들을 설립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비문해 성인과 아동을 교육하고 있다.
2012년에 교토 사유와 윤리상(Kyoto Prize in Thought and Ethics)을 수상했고 2013년에는 인도 정부의 시민 훈장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을 수여받았다. 현재 W. E. B. 두 보이스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