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도서는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묘사가 다수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집시계급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쓴 것이다.
저자 소개
집시계급: 전쟁에 공헌하지 않기 위해 노숙자 생활을 자처한 어느 일본 여자를 기리는 사람들이다. 노동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전쟁무기와 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직시한다.
책 소개
불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책들이 제작되고 있다. 쓰레기 같은 책들이. 이번에 출판할 집시계급의 소설 역시 그 쓰레기에 한 방울을 보태는 작업임이 분명하다. 이 소설은 이 시대에 왜 소설이 불가능한지, 그 한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기꺼이 원죄를 짊어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르는 사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 신도 예술도.
목차
컬트 포르노 탐정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 실종의 키메라™
라만차의 기사여, 풍자의 풍차를 돌려라!
혼자 행진하는 사람 장혜령
돌아와도 괜찮은 페이지 서호준
낭독: 대원서 하혜희
빛은 돌이킬 수 없다 송승언
친애하는 와츠에게
발췌
[……]
푸에지아 바스켓
당신은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라는 주어를 자주 쓰는데 그것은 집시계급이 복수라는 의미인가요? 원래는 당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그 그룹에 속해 있었나요?
집시계급
모르겠어요. 계급이라고 하면 원래 복수여야 하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우리도 모르겠네요. 아마 나만 남겨놓고 다들 떠났나 봐요. 사람들이 떠나면 떠날수록 더 집시계급 같아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계급의 정체성이라는 게 사람들이 많을수록 옅어지고, 떠날수록 더 분명해지는, 혼자 있을 때 가장 선명하다고 할까? 과연 능동적인 고립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아니, 모르겠습니다.
푸에지아 바스켓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요. 당신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패러디와 장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체호테’라는 필명으로 단편을 발표했지요. 누군가는 그 이름이 ‘체홉’과 ‘돈키호테’의 합성이라고 주장하더군요. 패러디나 패스티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설적인 효과에 대해 말해주세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장르의 문제와 연결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집시계급
골치 아픈 얘기군요. 먼저 답변을 하기 전에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그저 꼴리는 대로 글을 쓸 뿐이니까요.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설에 의해 우리가 쓰인다고 느낄 때가 많지요.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이 작가를 쓰는 겁니다. 집시계급은 글자들과 문장들 사이에서 완전히 매몰돼버리지요. [……] 과학자들의 비난을 각오하고 말하자면 우리가 추구하는 소설이라는 공간이야말로 양자적인 장소지요.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독자와 텍스트도 그 공간에서는 검은 구멍이 되지요. 예를 들면 우리의 소설은 철저히 독자들을 무시할 수 있지요. 욕을 할 수도 있지요. 독자 너 따위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감히 나를 읽으려 하냐고 따지는 거지요. 텍스트 스스로가 아무에게도 해독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거지요. 낡은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침묵하고, 면벽할 권리는 주장하는 거지요. 책벌레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똥과 먼지로 분해될 권리를 주장하는 거지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기 위한 텍스트의 노력은, 멍텅구리들이 흔히 말하는 무의미의 의미 혹은, 무용의 유용과 같은 말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거지요. 그것은 훨씬 더 공격적이고 정치적이지요.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를 수도 있지요. 누군가가 페이지를 여는 순간 자연발화를 일으켜 분신하는 거지요.
텍스트가 텍스트임을 스스로 포기할 때, 텍스트가 자살을 선택할 때 패러디나 패스티시는 유용한 도구로 쓰이지요. 텍스트는 텍스트 스스로를 패러디하지요. 결과적으로 패러디는 패러디의 패러디가 될 수밖에 없지요. 정직한 텍스트일수록 패러디를 패러디하지요. 좋은 소설은 이것은 소설일 뿐이야, 라고 미리 말해주는 소설이지요. 패러디는 역사를 소재로 삼지 않지요. 패러디는 오히려 역사 소설을 쓰는 작가를 소재로 삼지요. 패러디는 기사도에 관해 쓰는 게 아니라, 타락한 기사도의 광기에 관해 쓰지요. 패러디는 과거에는 그리 관심이 없지요, 패러디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에서 미래로 뻗어나갈 뿐이지요. 과거는 미치지 않았지요, 미친 것은 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드는 현대인들의 욕망이지요. 패러디는 역사를 재해석하지 않지요. 패러디는 역사를 재해석하는 사람들을 거꾸로 재해석하지요. 패러디는 재해석의 재해석이지요. 따라서 패러디와 역사 수정주의자들과의 숙명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지요.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잔머리를 굴리고, 비겁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질이 더 안 좋은 놈들이지요. 패러디에게서 노쇠하여 죽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지요. 패러디에겐 폭력적인 아버지가 남긴 선명한 흉터가 있을 뿐입니다. 모든 ‘그때 만약’과 싸워야 하지요. 모든 ‘어쩔 수 없었어’는 죽어 마땅하지요.
[……]
푸에지아 바스켓
진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좀더 듣고 싶군요.
집시계급
대부분의 세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지지요. 많아봐야 세 개의 진영이지요. 시뮬레이션하면 세계는 바둑판이나 체스판인 거지요. 구성원들은 각 진영에 속한 돌이나 말들인 거지요. 대표적인 게 정당정치지요. 양당의 주도하에 굴러가는 의회민주주의란 진보당과 보수당이 기획한 영구집권 시나리오에 불과한 거지요. 선거란 지배를 받기 위해 두 개의 진영 중에 좀 덜 얄미운 쪽을 선택하는 행위지요. 두 개의 정당은 언뜻 보기에 경쟁하고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동반자지요. 권력을 가진 진영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진영의 욕망은 언제나 일치하지요. 머리는 두 개지만 몸은 하나인, 히드라인 거지요. 민주주의란 가면을 쓴 독재지요.
문단도 마찬가지지요. 똑같은 욕망을 가진 진영들이 ‘상상 오르가슴의 공동체’를 형성하지요. 상상 오르가슴이란, 오르가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가짜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하는 거지요. 사실 그들은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도 없고, 오르가슴이 무엇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진영에 속해 있는 이상 그들은 느끼는 척하는 수밖에 없지요. 남들이 느낀다고 하니까 자신도 느껴야 하지요. 상상 오르가슴은 전염성이 강하지요. 두 개 혹은,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진영에 속해 있는 이상, 상상 오르가슴의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
(「푸에지아 바스켓과의 인터뷰 —제28회 세계집시포럼」에서 발췌, 본 책 비수록)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가 찬양해 마지않는 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등장인물이 입은 옷의 소재가 비단인지, 모피인지, 인조가죽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폴리우레탄 합성 고무인지에 관해 꼼꼼하게 기록해뒀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등장인물일지라도, 예를 들면 피츠로이 씨가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학자풍인지, 귀족적인지, 야심가인지, 염세주의자인지, 그런 척만 하는 속물인지, 혹시 그에게 예술가의 기질은 없는지, 신성한 바보인지, 그냥 바보인지를 독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을 것이다, 아마도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면 선입견이나 미신 따위가 개입할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소설적인 너무나 소설적인 인물을 창조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탐정 쿠옹은 ‘피츠로이 씨는 좋같았다.’라는 표현에 만족하기로 한다. (28쪽)
키메라™ 실종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소설가와 탐정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겐 기본소득과 영감이 필요하다. 나는 성벽 주위를 돌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주)도롱뇽수도원의 둘레는 정확하게 2477걸음이었다. 동물혁명이 이 사건의 배후일까? 마츠코는 정말 고양이해방전선의 첩자였을까? 점점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처럼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이 탐정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10미터 앞에서 사슴벌레 한 마리가 지그재그로 걸어오더니 내 귓구멍으로 들어왔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살고 있던 놈이었다. 무언가로 잠시 덮어뒀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놈이었다. 사슴벌레는 고막을 뚫고 뇌 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해마와 시상하부를 지나 두정엽에 도달했다. 매너리즘이 나를 유혹했다. 자살해라. 자살해라. 자살해버려라. (98쪽)
키메라™ 실종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들개연대의 ‘비글구명운동’에 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비글은 개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호감을 갖는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동물 실험에 무차별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스누피도 비글이다) 들개연대는 유독 한 종에게만 강요된 희생을 비판하며 비글 종을 영원히 실험동물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군견, 인명 구조견, 마약 탐지견, 맹인 안내견 등이 지금껏 인류를 위해 헌신해온 것을 고려했을 때 그 어떤 개과 동물에게도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OECD 국가들뿐 아니라 다국적 기업들에게도 커다란 호응을 얻는다. 그 결과 ‘국제실험동물제한법률’ 제정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 법률은 과도기적인 것으로서 영장류 및 개과 동물에게는 해당되지만 고양이과 동물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왜 드높은 재단이 개의 성격을 가진 고양이 즉, 키메라™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키메라™를 이용해 전 세계의 실험동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실험동물제한법률’이 제정되면 개를 대신할 실험동물이 필요한데 가장 유력한 후보가 고양이다. 문제는 개에 비해 인간에게 비타협적인 고양이의 성격상 실험을 하는 데 많은 불편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개의 성격을 가진 고양이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들개연대의 비밀 문건을 보면 이미 상당수의 제약회사, 화장품회사, 의과대학, 수의과대학 등에 키메라™를 대량 공급하기로 계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10쪽)
모래사막 언덕 위, 세 명의 도둑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이들에게 메피스토가 찾아온다. 예언에 의하면 두 명은 유혹을 물리치고, 한 명은 굴복하게 될 것이다. 도둑 중 한 명이 말했다.
“주여, 정녕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돼지 가면을 쓴 사형 집행자가 예수라는 이름의 도둑에게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주를 버리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처음에 예수는 제안을 거절한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는 다시 물었고 이번에도 하늘은 침묵했다.
사형 집행자가 최후의 유혹을 한다.
“여기서 혁명을 포기할 텐가? 주를 버려라.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해주겠다. 마지막으로 묻는 거다.”
도둑의 왕 예수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주를 버리겠습니다.”
사형 집행자는 돼지 가면을 벗고 송곳니로 예수의 목을 문다.
예수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면서 피가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모래바람이 예수의 피를 흩어버린다. 예수는 즉사한다.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은 공포와 함께 오르가슴을 경험한다.
모든 게 끝났다. 혁명은 실패했다.
더이상 이웃을 사랑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시체는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수의에 싸여 무덤에 안치된다.
3일 후, 영생을 얻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그들은 이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닌, 오르가슴의 공동체가 되었다.
오르가슴의 공동체는 부활한 예수가 부담스럽다.
더이상은 싸우고 싶지 않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가족을 버리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혁명에 비하면 독재자의 핍박은 얼마나 달콤한가.
예수는 자신을 받아줄 교회를 찾아 세계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부활한 적그리스도는 혁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웃을 사랑하라.
그는 사랑에 집착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148-150쪽)
영화를 보고 나온 사내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쇠사슬로 자기 몸을 묶고, 다시 그 사슬을 끊어내던 곡예사 남자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역겨웠지만 그 모습엔 묘하게 자신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그 미치광이 사내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을 떨치려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억누르려 할수록 곡예사 남자가 포효하는 소리에 그는 온몸이 떨리고, 어느새 그 미치광이가 자기 안에 살아 있음을 실감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장혜령)
그분이 오른쪽 어깨만 편안하게 해주시고 왼쪽 어깨는 내버려두어서 왼쪽 어깨는 너무 아팠어요. 장마가 이어졌어요. 비가 너무 와서 몇 번 빠지다가 자연스럽게 태극권을 그만두었고, 그 후로는 온몸이 아팠어요. 한번은 회사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는 누구나 아픈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맞는 말인 것 같았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너, 어깨 아프지? 했더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정말 아프다고 했거든요. (서호준)
혜희는 바깥에 나가기에 앞서, 먼저 그대의 즐거운 것을 가지라 말한다. 구슬 같은 것. 구슬 같은 게 뭐가 즐겁다는 말이겠니. 그래도 그런 것을 가져라. 그런 것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들여다보고, 빛바래 버리기 전에. 동이 트기 전에. 그대가 잿더미가 되기 전에. 빛나는 비밀 같은 것을 가져라. 어둡지 않은 것으로,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혜희 속삭이고 메가폰을 든다. (하혜희)
학수는 스탠리에게 시골길을 걷게 했고, 스탠리를 사무실에 안전하게 가뒀고, 스탠리의 아내를 만났고, 스탠리를 길바닥에 쓰러지게 했고, 스탠리를 리프트에서 뛰어내리게 했고, 스탠리를 박물관으로 가게 했고, 스탠리가 있는 건물이 폭파되도록 만들었다. (송승언)
안내의 말
이것은 344쪽의 책입니다. 집시계급의 소설, 사진, 부록 텍스트, 필자 4인(장혜령, 서호준, 하혜희, 송승언)의 개인적인 글로 구성된 이 책은 2015년에 저자와 코드프레스가 함께 출간을 계획했었고, 2018년에 진행이 이뤄져 2019년 2월 25일에 공개되었습니다.
『컬트 포르노 탐정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 실종의 키메라™』는 장르소설 형식을 집시계급의 방식으로 차용합니다. 이는 탐정 쿠옹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며 전개되는데, 그는 사건 배후의 거대 권력을 추적하는 자이지만, 약자에게 습관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존재이며, 정신착란에 빠진 경계 상의 인물입니다. 쿠옹은 드높은 재단의 의뢰로 인류를 행복에 젖게 할 첨단 생명공학의 결정체, 특허 취득 상품, 고양이, 키메라™를 훔쳐간 범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탐정 쿠옹을 비롯한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틈만 나면 여성을 평가하고 성적대상화합니다. 쿠옹은 어떤 올바름에 대해서 고뇌하지만 자기연민과 자가당착을 반복하고, 결코 남성 권력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성 인물이 주체적인 포지션으로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합니다. 탐정 쿠옹의 입장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왜곡되거나 가물가물하게 나타날 뿐이므로. 그에 따라 소수자를 착취하는 장면의 묘사 역시 불가결하게 되고, 독자는 독서에 따른 혐오감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이 소설이 여성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 저자로서 가능하지 않으므로)
이 소설은 정교한 결을 따라 사유를 쌓아올려나가는 작가적 태도와는 그 길을 달리합니다. 책의 참여 필자 중 한 명인 장혜령은 그 점에 대한 당혹감을 이야기하며 '일반적인 관점에서 좋은 소설의 극점에 있는 소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사고하는 글을 책 안에 남겼습니다. (혼자 행진하는 사람)
서호준은 아픈 것에 대해 말합니다. (돌아와도 괜찮은 페이지)
“누가 때렸을까요? 누가 괴롭혔을까요? 폭력 없이도 우리는 아파요.”
하혜희는 이 소설에 대한 헌시에 가까운 것을 남기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낭독: 대원서)
“결합된 우리의 말과 빔 / 암흑의 프리젠테이션을”
송승언은 오랜만에 만난 학수와 게임을 하는 등 이런저런 하루를 보내며 ‘저자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책의 운명’에 도달합니다. (빛은 돌이킬 수 없다)
집시계급은 문단으로 명명되는 것 아래 자리하고 있을 작법, 태도, 권위를, 그리고 독자마저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비맥락적으로 이야기들을 팝업시키고, “구토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며 읽는 이가 느끼게 될 역겨움을 의도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만의 풍차 같은⋯⋯ 코미디와 함께. 그것의 혼란한 여러 갈래 양상에서 방향성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 소설이 이 시대의 소수자들과 함께 싸워나가겠다는 목적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집시계급은 남성의 역사로부터 파생해 지금까지 형성되어 온 거대한 권력들이 ‘신성한 노동’과 ‘인류의 행복’으로 포장해 자행한 그 모든 착취와 폭력을 최대한 더럽고, 역겨우며, 우스꽝스러운 형상으로 묘사하고, 그러한 권력이 자멸로 향하리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는 동물을 착취하는 ‘인류의 사악함’까지 포괄합니다. 코드프레스로서는 그 의도대로 이 소설이 남성 권력에게 향하는 불편함으로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집시계급은 과거 자신의 다른 작품의 소개글에서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타격을 입히고자 한다"고 돌려 말하지 않고 전면에 내걸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코드프레스는 집시계급의 소설을 ‘문학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 이를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거대한 희곡으로 여기고 이것을 쓰지 않았을까요. 소설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난삽하게’ 구사하는 것들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는 작가의 승인과 무관하게, 읽기를 선택한 독자의 몫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도 노동인지가 궁금했다. 저 높은 돔 위에서 우리는 막연히 예술이라는 그 무언가를 떠올리며 잠시 그리워했을 뿐이다⋯⋯”
코드프레스 웹사이트에서 책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cordpress.org
※ 본 도서는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묘사가 다수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집시계급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쓴 것이다.
저자 소개
집시계급: 전쟁에 공헌하지 않기 위해 노숙자 생활을 자처한 어느 일본 여자를 기리는 사람들이다. 노동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전쟁무기와 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직시한다.
책 소개
불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책들이 제작되고 있다. 쓰레기 같은 책들이. 이번에 출판할 집시계급의 소설 역시 그 쓰레기에 한 방울을 보태는 작업임이 분명하다. 이 소설은 이 시대에 왜 소설이 불가능한지, 그 한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기꺼이 원죄를 짊어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르는 사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 신도 예술도.
목차
컬트 포르노 탐정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 실종의 키메라™
라만차의 기사여, 풍자의 풍차를 돌려라!
혼자 행진하는 사람 장혜령
돌아와도 괜찮은 페이지 서호준
낭독: 대원서 하혜희
빛은 돌이킬 수 없다 송승언
친애하는 와츠에게
발췌
[……]
푸에지아 바스켓
당신은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라는 주어를 자주 쓰는데 그것은 집시계급이 복수라는 의미인가요? 원래는 당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그 그룹에 속해 있었나요?
집시계급
모르겠어요. 계급이라고 하면 원래 복수여야 하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우리도 모르겠네요. 아마 나만 남겨놓고 다들 떠났나 봐요. 사람들이 떠나면 떠날수록 더 집시계급 같아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계급의 정체성이라는 게 사람들이 많을수록 옅어지고, 떠날수록 더 분명해지는, 혼자 있을 때 가장 선명하다고 할까? 과연 능동적인 고립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아니, 모르겠습니다.
푸에지아 바스켓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요. 당신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패러디와 장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체호테’라는 필명으로 단편을 발표했지요. 누군가는 그 이름이 ‘체홉’과 ‘돈키호테’의 합성이라고 주장하더군요. 패러디나 패스티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설적인 효과에 대해 말해주세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장르의 문제와 연결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집시계급
골치 아픈 얘기군요. 먼저 답변을 하기 전에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그저 꼴리는 대로 글을 쓸 뿐이니까요.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설에 의해 우리가 쓰인다고 느낄 때가 많지요.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이 작가를 쓰는 겁니다. 집시계급은 글자들과 문장들 사이에서 완전히 매몰돼버리지요. [……] 과학자들의 비난을 각오하고 말하자면 우리가 추구하는 소설이라는 공간이야말로 양자적인 장소지요.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독자와 텍스트도 그 공간에서는 검은 구멍이 되지요. 예를 들면 우리의 소설은 철저히 독자들을 무시할 수 있지요. 욕을 할 수도 있지요. 독자 너 따위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감히 나를 읽으려 하냐고 따지는 거지요. 텍스트 스스로가 아무에게도 해독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거지요. 낡은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침묵하고, 면벽할 권리는 주장하는 거지요. 책벌레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똥과 먼지로 분해될 권리를 주장하는 거지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기 위한 텍스트의 노력은, 멍텅구리들이 흔히 말하는 무의미의 의미 혹은, 무용의 유용과 같은 말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거지요. 그것은 훨씬 더 공격적이고 정치적이지요.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를 수도 있지요. 누군가가 페이지를 여는 순간 자연발화를 일으켜 분신하는 거지요.
텍스트가 텍스트임을 스스로 포기할 때, 텍스트가 자살을 선택할 때 패러디나 패스티시는 유용한 도구로 쓰이지요. 텍스트는 텍스트 스스로를 패러디하지요. 결과적으로 패러디는 패러디의 패러디가 될 수밖에 없지요. 정직한 텍스트일수록 패러디를 패러디하지요. 좋은 소설은 이것은 소설일 뿐이야, 라고 미리 말해주는 소설이지요. 패러디는 역사를 소재로 삼지 않지요. 패러디는 오히려 역사 소설을 쓰는 작가를 소재로 삼지요. 패러디는 기사도에 관해 쓰는 게 아니라, 타락한 기사도의 광기에 관해 쓰지요. 패러디는 과거에는 그리 관심이 없지요, 패러디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에서 미래로 뻗어나갈 뿐이지요. 과거는 미치지 않았지요, 미친 것은 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드는 현대인들의 욕망이지요. 패러디는 역사를 재해석하지 않지요. 패러디는 역사를 재해석하는 사람들을 거꾸로 재해석하지요. 패러디는 재해석의 재해석이지요. 따라서 패러디와 역사 수정주의자들과의 숙명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지요.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잔머리를 굴리고, 비겁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질이 더 안 좋은 놈들이지요. 패러디에게서 노쇠하여 죽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지요. 패러디에겐 폭력적인 아버지가 남긴 선명한 흉터가 있을 뿐입니다. 모든 ‘그때 만약’과 싸워야 하지요. 모든 ‘어쩔 수 없었어’는 죽어 마땅하지요.
[……]
푸에지아 바스켓
진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좀더 듣고 싶군요.
집시계급
대부분의 세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지지요. 많아봐야 세 개의 진영이지요. 시뮬레이션하면 세계는 바둑판이나 체스판인 거지요. 구성원들은 각 진영에 속한 돌이나 말들인 거지요. 대표적인 게 정당정치지요. 양당의 주도하에 굴러가는 의회민주주의란 진보당과 보수당이 기획한 영구집권 시나리오에 불과한 거지요. 선거란 지배를 받기 위해 두 개의 진영 중에 좀 덜 얄미운 쪽을 선택하는 행위지요. 두 개의 정당은 언뜻 보기에 경쟁하고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동반자지요. 권력을 가진 진영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진영의 욕망은 언제나 일치하지요. 머리는 두 개지만 몸은 하나인, 히드라인 거지요. 민주주의란 가면을 쓴 독재지요.
문단도 마찬가지지요. 똑같은 욕망을 가진 진영들이 ‘상상 오르가슴의 공동체’를 형성하지요. 상상 오르가슴이란, 오르가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가짜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하는 거지요. 사실 그들은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도 없고, 오르가슴이 무엇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진영에 속해 있는 이상 그들은 느끼는 척하는 수밖에 없지요. 남들이 느낀다고 하니까 자신도 느껴야 하지요. 상상 오르가슴은 전염성이 강하지요. 두 개 혹은,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진영에 속해 있는 이상, 상상 오르가슴의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
(「푸에지아 바스켓과의 인터뷰 —제28회 세계집시포럼」에서 발췌, 본 책 비수록)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가 찬양해 마지않는 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등장인물이 입은 옷의 소재가 비단인지, 모피인지, 인조가죽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폴리우레탄 합성 고무인지에 관해 꼼꼼하게 기록해뒀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등장인물일지라도, 예를 들면 피츠로이 씨가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학자풍인지, 귀족적인지, 야심가인지, 염세주의자인지, 그런 척만 하는 속물인지, 혹시 그에게 예술가의 기질은 없는지, 신성한 바보인지, 그냥 바보인지를 독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을 것이다, 아마도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면 선입견이나 미신 따위가 개입할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소설적인 너무나 소설적인 인물을 창조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탐정 쿠옹은 ‘피츠로이 씨는 좋같았다.’라는 표현에 만족하기로 한다. (28쪽)
키메라™ 실종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소설가와 탐정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겐 기본소득과 영감이 필요하다. 나는 성벽 주위를 돌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주)도롱뇽수도원의 둘레는 정확하게 2477걸음이었다. 동물혁명이 이 사건의 배후일까? 마츠코는 정말 고양이해방전선의 첩자였을까? 점점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처럼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이 탐정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10미터 앞에서 사슴벌레 한 마리가 지그재그로 걸어오더니 내 귓구멍으로 들어왔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살고 있던 놈이었다. 무언가로 잠시 덮어뒀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놈이었다. 사슴벌레는 고막을 뚫고 뇌 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해마와 시상하부를 지나 두정엽에 도달했다. 매너리즘이 나를 유혹했다. 자살해라. 자살해라. 자살해버려라. (98쪽)
키메라™ 실종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들개연대의 ‘비글구명운동’에 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비글은 개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호감을 갖는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동물 실험에 무차별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스누피도 비글이다) 들개연대는 유독 한 종에게만 강요된 희생을 비판하며 비글 종을 영원히 실험동물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군견, 인명 구조견, 마약 탐지견, 맹인 안내견 등이 지금껏 인류를 위해 헌신해온 것을 고려했을 때 그 어떤 개과 동물에게도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OECD 국가들뿐 아니라 다국적 기업들에게도 커다란 호응을 얻는다. 그 결과 ‘국제실험동물제한법률’ 제정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 법률은 과도기적인 것으로서 영장류 및 개과 동물에게는 해당되지만 고양이과 동물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왜 드높은 재단이 개의 성격을 가진 고양이 즉, 키메라™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키메라™를 이용해 전 세계의 실험동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실험동물제한법률’이 제정되면 개를 대신할 실험동물이 필요한데 가장 유력한 후보가 고양이다. 문제는 개에 비해 인간에게 비타협적인 고양이의 성격상 실험을 하는 데 많은 불편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개의 성격을 가진 고양이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들개연대의 비밀 문건을 보면 이미 상당수의 제약회사, 화장품회사, 의과대학, 수의과대학 등에 키메라™를 대량 공급하기로 계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10쪽)
모래사막 언덕 위, 세 명의 도둑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이들에게 메피스토가 찾아온다. 예언에 의하면 두 명은 유혹을 물리치고, 한 명은 굴복하게 될 것이다. 도둑 중 한 명이 말했다.
“주여, 정녕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돼지 가면을 쓴 사형 집행자가 예수라는 이름의 도둑에게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주를 버리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처음에 예수는 제안을 거절한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는 다시 물었고 이번에도 하늘은 침묵했다.
사형 집행자가 최후의 유혹을 한다.
“여기서 혁명을 포기할 텐가? 주를 버려라.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해주겠다. 마지막으로 묻는 거다.”
도둑의 왕 예수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주를 버리겠습니다.”
사형 집행자는 돼지 가면을 벗고 송곳니로 예수의 목을 문다.
예수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면서 피가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모래바람이 예수의 피를 흩어버린다. 예수는 즉사한다.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은 공포와 함께 오르가슴을 경험한다.
모든 게 끝났다. 혁명은 실패했다.
더이상 이웃을 사랑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시체는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수의에 싸여 무덤에 안치된다.
3일 후, 영생을 얻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그들은 이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닌, 오르가슴의 공동체가 되었다.
오르가슴의 공동체는 부활한 예수가 부담스럽다.
더이상은 싸우고 싶지 않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가족을 버리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혁명에 비하면 독재자의 핍박은 얼마나 달콤한가.
예수는 자신을 받아줄 교회를 찾아 세계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부활한 적그리스도는 혁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웃을 사랑하라.
그는 사랑에 집착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148-150쪽)
영화를 보고 나온 사내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쇠사슬로 자기 몸을 묶고, 다시 그 사슬을 끊어내던 곡예사 남자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역겨웠지만 그 모습엔 묘하게 자신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그 미치광이 사내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을 떨치려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억누르려 할수록 곡예사 남자가 포효하는 소리에 그는 온몸이 떨리고, 어느새 그 미치광이가 자기 안에 살아 있음을 실감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장혜령)
그분이 오른쪽 어깨만 편안하게 해주시고 왼쪽 어깨는 내버려두어서 왼쪽 어깨는 너무 아팠어요. 장마가 이어졌어요. 비가 너무 와서 몇 번 빠지다가 자연스럽게 태극권을 그만두었고, 그 후로는 온몸이 아팠어요. 한번은 회사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는 누구나 아픈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맞는 말인 것 같았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너, 어깨 아프지? 했더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정말 아프다고 했거든요. (서호준)
혜희는 바깥에 나가기에 앞서, 먼저 그대의 즐거운 것을 가지라 말한다. 구슬 같은 것. 구슬 같은 게 뭐가 즐겁다는 말이겠니. 그래도 그런 것을 가져라. 그런 것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들여다보고, 빛바래 버리기 전에. 동이 트기 전에. 그대가 잿더미가 되기 전에. 빛나는 비밀 같은 것을 가져라. 어둡지 않은 것으로,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혜희 속삭이고 메가폰을 든다. (하혜희)
학수는 스탠리에게 시골길을 걷게 했고, 스탠리를 사무실에 안전하게 가뒀고, 스탠리의 아내를 만났고, 스탠리를 길바닥에 쓰러지게 했고, 스탠리를 리프트에서 뛰어내리게 했고, 스탠리를 박물관으로 가게 했고, 스탠리가 있는 건물이 폭파되도록 만들었다. (송승언)
안내의 말
이것은 344쪽의 책입니다. 집시계급의 소설, 사진, 부록 텍스트, 필자 4인(장혜령, 서호준, 하혜희, 송승언)의 개인적인 글로 구성된 이 책은 2015년에 저자와 코드프레스가 함께 출간을 계획했었고, 2018년에 진행이 이뤄져 2019년 2월 25일에 공개되었습니다.
『컬트 포르노 탐정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 실종의 키메라™』는 장르소설 형식을 집시계급의 방식으로 차용합니다. 이는 탐정 쿠옹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며 전개되는데, 그는 사건 배후의 거대 권력을 추적하는 자이지만, 약자에게 습관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존재이며, 정신착란에 빠진 경계 상의 인물입니다. 쿠옹은 드높은 재단의 의뢰로 인류를 행복에 젖게 할 첨단 생명공학의 결정체, 특허 취득 상품, 고양이, 키메라™를 훔쳐간 범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탐정 쿠옹을 비롯한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틈만 나면 여성을 평가하고 성적대상화합니다. 쿠옹은 어떤 올바름에 대해서 고뇌하지만 자기연민과 자가당착을 반복하고, 결코 남성 권력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성 인물이 주체적인 포지션으로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합니다. 탐정 쿠옹의 입장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왜곡되거나 가물가물하게 나타날 뿐이므로. 그에 따라 소수자를 착취하는 장면의 묘사 역시 불가결하게 되고, 독자는 독서에 따른 혐오감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이 소설이 여성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 저자로서 가능하지 않으므로)
이 소설은 정교한 결을 따라 사유를 쌓아올려나가는 작가적 태도와는 그 길을 달리합니다. 책의 참여 필자 중 한 명인 장혜령은 그 점에 대한 당혹감을 이야기하며 '일반적인 관점에서 좋은 소설의 극점에 있는 소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사고하는 글을 책 안에 남겼습니다. (혼자 행진하는 사람)
서호준은 아픈 것에 대해 말합니다. (돌아와도 괜찮은 페이지)
“누가 때렸을까요? 누가 괴롭혔을까요? 폭력 없이도 우리는 아파요.”
하혜희는 이 소설에 대한 헌시에 가까운 것을 남기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낭독: 대원서)
“결합된 우리의 말과 빔 / 암흑의 프리젠테이션을”
송승언은 오랜만에 만난 학수와 게임을 하는 등 이런저런 하루를 보내며 ‘저자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책의 운명’에 도달합니다. (빛은 돌이킬 수 없다)
집시계급은 문단으로 명명되는 것 아래 자리하고 있을 작법, 태도, 권위를, 그리고 독자마저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비맥락적으로 이야기들을 팝업시키고, “구토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며 읽는 이가 느끼게 될 역겨움을 의도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만의 풍차 같은⋯⋯ 코미디와 함께. 그것의 혼란한 여러 갈래 양상에서 방향성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 소설이 이 시대의 소수자들과 함께 싸워나가겠다는 목적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집시계급은 남성의 역사로부터 파생해 지금까지 형성되어 온 거대한 권력들이 ‘신성한 노동’과 ‘인류의 행복’으로 포장해 자행한 그 모든 착취와 폭력을 최대한 더럽고, 역겨우며, 우스꽝스러운 형상으로 묘사하고, 그러한 권력이 자멸로 향하리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는 동물을 착취하는 ‘인류의 사악함’까지 포괄합니다. 코드프레스로서는 그 의도대로 이 소설이 남성 권력에게 향하는 불편함으로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집시계급은 과거 자신의 다른 작품의 소개글에서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타격을 입히고자 한다"고 돌려 말하지 않고 전면에 내걸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코드프레스는 집시계급의 소설을 ‘문학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 이를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거대한 희곡으로 여기고 이것을 쓰지 않았을까요. 소설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난삽하게’ 구사하는 것들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는 작가의 승인과 무관하게, 읽기를 선택한 독자의 몫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도 노동인지가 궁금했다. 저 높은 돔 위에서 우리는 막연히 예술이라는 그 무언가를 떠올리며 잠시 그리워했을 뿐이다⋯⋯”
코드프레스 웹사이트에서 책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cordpress.org